동생이 아직 젖병에 든 분유를 먹을 때니, 내가 만 세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날 집에는 아빠와 동생과 나만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동생을 안고 현관문을 나가는 게 보였다. 나한테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아빠! 아빠! 나도 갈래!" 아무리 불러도 아빠와 동생을 빨아들인 현관문은 말이 없었다.
갑자기 집에 혼자 남겨진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때의 내 머릿속을 지금 내가 아는 말로 표현하면, 패닉이었다.
울고 있을 새가 없었다. 잠깐 얼어붙었던 나는 이내 열려 있던 현관문을 밀고 아빠를 찾으러 나갔다.
찬 밤공기가 얇은 옷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보통 때라면 춥다고 울었겠지만, 그때는 꾹 참았다. 공포심이 추위를 삼켜버린 듯했다.
캄캄한 아파트 복도 저 멀리 아빠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빠, 아빠, 나도 데리고 가!" 있는 힘껏 아빠를 불렀지만, 아빠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 무섭고 서러워서 더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혀가 말려서 뭉개진 말소리가 울부짖음으로 변해 갔다. 그래도 아빠를 놓칠까 봐 눈앞의 어둠을 걷어내듯 팔을 휘저으며 뛰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래 아빠 뒤를 쫓아갔을까. 아빠가 복도 끝을 지나 건물의 다른 편 복도에 있는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아빠를 정신없이 쫓아 그 집으로 들어갔다. 나랑 가끔 같이 놀던 친구가 사는 이웃집이었다.
엉엉 울며 들어오는 나를 친구의 엄마가 놀라며 맞아 주셨다. 죽을 것 같던 무서움이 한순간 사라지고 '이제 난 괜찮아'하는 안도감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친구의 엄마가 "세상에, 가엾어라." 하시며, 신발도 못 신고 아빠를 쫓아오느라 새까매진 내 발바닥을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그제야 느껴진 추위 때문에 벌벌 떠는 나를 이불로 감싸 주셨다. 하염없이 아늑했고 안심이 되었다.
내가 초등학생쯤 되던 어느 날, 엄마와 아빠에게 이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보았다.
"아아, 그때? 네가 어떻게 그걸 기억하고 있어?" 아빠의 말씀.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훨씬 더 많이 기억한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 텐데, 우리는 올챙이 시절을 참 빨리 잊는다.
내가 아빠를 쫓아 맨발로 뛰던 그날, 엄마는 외출 중이었고 아빠가 동생에게 분유를 먹이고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분유를 먹던 동생이 분수 물이 솟구치듯 왈칵 토하자, 겁이 더럭 난 아빠는 동생을 안고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러 뛰어간 것이었다. 집에 세 살짜리가 남겨져 있다는 걸 까맣게 잊은 채...
어릴 때 나는 엄마나 아빠가 나를 버릴까 봐 불안했다. 그렇다고 분리불안이 심했던 것 같진 않다. 엄마가 외갓집이나 이웃집에 나를 자주 맡기는 편이었고, 그때마다 별로 울지 않고 엄마를 잘 떨어지곤 했으니까.
그러나 마음속은 복잡하고 슬펐다. 할머니나 이모들이 아무리 잘해 줘도 나는 엄마하고 같이 있고 싶었다.
엄마가 동생을 맡기고 나랑만 있어줬으면 했다. 그러나 엄마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엄마랑 떨어지고 며칠이 지나면 엄마가 혹시 나를 데리러 오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이런 감정들이 사춘기 때 소외감으로 발전했던 것 같다. 동생은 옆에 꼭 끼고 있으면서 나만 맨날 여기저기 빙빙 돌리며 맡기는 듯해서 엄마한테 서운했다.
나는 겉으로는 별로 심하지 않게 사춘기를 지나 보냈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힘이 들었다. 집안에서 늘 인싸가 되고 싶은 '아싸'였다. 그땐 몰랐다, 한번 아웃사이더는 영원한 아웃사이더라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엄마가 나를 버릴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나이를 먹은 지금, 나를 남겨놓고 가던 아빠의 뒷모습이 생각나는 건, 외갓집 잠자리에서 엄마가 보고 싶어 숨죽여 울던 때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어쩌면 그 무엇보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건 그때 느꼈던 기분, 마음뿐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