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하시던 사업이 잘못되었다.
내가 좀 더 컸을 때 듣기로는, 아빠와 함께 사업을 하던 사람이 돈을 모두 챙겨 도망을 갔다고 한다. 내가 만 네 살쯤 됐을 때라 생각이 많이 나지는 않지만, 엄마가 자꾸 울고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자주 오시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정읍 친가로 보내어졌다.
내가 왜 친가에, 그것도 자주 만나지 않아서 어색한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혼자 가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동생은 어려서 엄마 손이 많이 가니까, 조금이나마 엄마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러나, 안 그래도 불안한데 - 아무리 어른들이 쉬쉬 해도 아이들은 다 안다 - 엄마와 떨어져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을 낯선 곳에서 지내야 하다니, 네 살박이에게는 너무 가혹했다.
할머니를 따라 기차를 타고 시골집에 갔을 때까진 괜찮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아파트에서만 살아본 나에게 흙마당이 있는 시골집은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게다가 나는 내게 손을 스멀스멀 뻗어 오는 외부의 자극들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였다. 새롭고 낯선 환경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건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다 무섭고 싫었다.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었다. 울다가 가까스로 잠이 들었고, 어쩌다 깨기라도 하면 또 울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아프고 허전하고 슬펐다.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군데군데 끊어지지만, 좀 적응이 되고 나서는 그럭저럭 잘 지냈던 것 같다. 내가 첫 손주라 그랬는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애정은 남다르셨다. 할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셨지만 나를 예뻐하시는 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언제나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계셨고, 나를 "내 강아지"라고 부르셨다. 진짜 강아지는 마루 밑 마당에 있었는데 말이다. 온몸이 새하얗고 눈과 코만 백설기 떡에 건포도 박혀 있듯 까만 귀여운 강아지였다.
앞마당과 뒷마당에 멍석을 깔고 고추나 보리, 콩 같은 것들을 말리던 것도 기억난다. 까까머리 동네 아이들이 할머니 몰래 마당에 들어와 꽃을 꺾어가기도 했다. 건넌방 창문으로 보이던 지붕 위 고양이도 생각난다. 배앓이를 몹시 하던 날 그 고양이를 보며 아픔을 달래기도 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의 호기심을 몽땅 빨아들인 것은 단연 벽장이었다. 그것은 안방 벽에 난, 조그만 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여닫이 문이었다. 내 키가 닿기에는 턱없이 높아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기에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벽장문을 열고 뭔가를 꺼내는 사람은 대부분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벽장에서 사탕이나 장난감 같은 것들을 꺼내어 내게 주셨다. 그중 하나가 종이와 실이었는데, 할머니는 종이에 구멍을 여러 개 뚫어서 내가 바느질 놀이를 하게 해 주셨다.
대학에서 아동학을 전공한 나는 어느 날 유치원 교실에서 바느질 놀이 자료들을 보고 할머니 생각이 났었다. 몬테소리보다도, 그 어느 교육자보다도 나에게는 우리 할머니가 더 훌륭한 분이셨다.
한 번은 할아버지께 엄청 혼이 났다. 아마 뭔가를 달라고 떼를 쓴 것 같은데, 평소 별로 말씀이 없던 할아버지가 혼내실 정도면 내 생떼가 아마 저 세상 수준이었을 것이다. 큰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 서러움 끝에 짜증 한 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칭얼대는 나를 할머니가 등에 업고 방바닥을 걸레로 문지르셨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힌 채, 걸레가 지나갈 때마다 생기는 방바닥의 물 얼룩을 보며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었다.
혼이 난 내가 안쓰러웠던지 할머니가 벽장문을 열고 뭔가를 꺼내 주셨다. 설탕물을 바른 솜처럼 하얀 식빵이었는데 기막히게 맛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설탕물이 아니라 꿀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따뜻한 봄날 하늘하늘 핀 꽃잎 같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벌써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그 벽장이 생각난다.
나에게 벽장은 보물상자였다. 할머니의 깊은 마음 같은 벽장.
벽장은 할머니의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