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아직 기어 다닐 무렵이니 아마 내가 만 세 살 정도 됐을 때인 것 것 같다.
그날 나는 영자 언니랑 안방 바로 옆방에 있었다. 영자 언니는 외가와 우리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살림을 돕던 가사도우미 언니였다. 그 무렵의 나는 엄마보다 영자 언니랑 보낸 기억이 더 많다.
그날도 영자 언니는 나랑 놀아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갑자기 안방에서 큰 소리가 났다. 엄마의 비명 소리와 아빠가 뭐라 크게 외치는 소리 같았다.
"너네 엄마 아빠 싸우나 봐." 영자 언니가 이렇게 말하며 부스스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한참 동안 영자 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안방에서는 계속 큰 소리가 났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가보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영자 언니 말대로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소리라고 믿고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빠와 엄마가 싸우는 건 정말 무섭고 싫었으니까.
아니면 하던 놀이에 열중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영자 언니를 찾으러 방을 나갔다. 내가 있던 방 문을 열면 맞은편에 안방이 보였는데, 아빠가 뭔가를 치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와 영자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자 아빠가 계속 방바닥을 닦으며 말했다. "네 동생 죽을 뻔했다."
그제야 방바닥에 묻어있는 핏자국과 여기저기 어질러진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나는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파트 마당을 급하게 뛰어가는 엄마와 영자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포대기에 동생을 싸서 안고 있었고, 영자 언니는 울면서 그 옆에서 뛰고 있었다. 동생을 싼 포대기에 안방 방바닥에서 본 것과 똑같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여기까지가 그날 내 기억의 전부이다.
동생이 내가 가지고 놀던 소꿉놀이 장난감 하나를 삼켰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다. 온 집안을 기어 다니며 손에 잡히는 것들은 죄다 입으로 가져가던 동생이었으니, 내 소꿉놀이도 예외는 아니었으리라.
엄마와 아빠가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내 소꿉놀이 장난감 하나가 동생의 목으로 넘어간 뒤였다. 급한 나머지 아빠가 동생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 낙지의 빨판처럼 붙어있던 장난감을 빼내었고, 엄마가 그 길로 동생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동생은 목숨을 잃었을 것인데, 아버지의 재빠른 판단과 행동이 동생을 살렸다는 게 그날 엄마가 의사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어른이 될 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소꿉장난을 해본 적이 없다. 동생이 내 소꿉놀이 장난감을 삼켰다는 이유로 우리 집에서는 소꿉놀이가 금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네 빠끔살이 동생이 먹고 큰일 날 뻔했잖아. 두 번 다시 빠끔살이는 생각도 하지 마." 이게 그 후로 수없이 엄마 아빠한테 들은 말이다.
나는 빠끔살이라 불렸던 소꿉놀이 장난감을 사 달라고 조른 기억도, 하루아침에 사라진 내 빠끔살이를 내놓으라고 떼를 쓴 기억도 없다. 그보다는 내가 뭔가 몹시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 아빠의 말이 "너 때문이야. 네가 빠끔살이를 했기 때문이야."라고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작년 여름 서울을 방문했을 때 북촌에 있는 서울교육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1960-70년대 다양한 학습자료, 놀잇감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추억을 더듬으며 구경하다가 진열장 안에 있는 소꿉놀이 장난감들을 발견했다. 그 순간 나 자신도 미처 몰랐던 감정이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건 그리움이었다.
"안녕! 우리 오랜만이지? 보고 싶었어." 작게 속삭이는 목구멍이 뜨거워져 왔다.
나는 거기서 아주아주 오랫동안 알록달록 야무진 소꿉놀이 장난감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