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본질

뮤지컬 <Hadestown>을 보고

by Anna Lee

몹시 추운 날, 뮤지컬을 보러 브로드웨이에 갔다. 오랜만이었다.



뮤지컬을 좋아해서 같은 공연을 여러 번 보기도 하고 뮤지컬 넘버를 질릴 때까지 듣기도 하지만, 한동안 극장에 가지 않았었다. 팬데믹을 겪은 후 붐비는 곳이 석연치 않았고, 총기사고가 잦을 때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혼자보기'에 익숙해져 버렸다.

혼자보기나 모여보기나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나는 OTT를 통해 영화나 쇼를 혼자 보며 울고 웃는 편안함에 푹 빠져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내게 묻지도 않고 예매를 해버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객석에서 뭇사람과 함께 <Hadestown>(하데스타운)을 볼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귀차니즘을 떨치고 불빛 화려한 밤거리 한복판의 극장에 들어선 나는 그만 모여보기의 묘미에 홀딱 압도당하고 말았다. 극장을 꽉 메운 사람들의 열기와 생동감이 추운 바깥 날씨를 잊게 해 주었다. 뮤지컬 관람이라는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한 공간에 모여든 사람들의 기대감에 부푼 소란스러움은 손바닥으로 툭툭 쳐 가라앉혀도 자꾸만 떠오르는 풍선처럼 달뜨고 즐거웠다. 공연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까지 이어지던 박수와 환호, 공감의 몸짓들은 봄처럼 따뜻했다. 여럿이 같이 누리는 감동은 딱딱한 의자 등받이가 흐물흐물해 보일만큼 뜨겁게 퍼져 나갔다.



서사시의 뮤즈 칼리오페의 아들 오르페우스는 님프 에우리디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얼마 안 있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고 만다.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다시 이승으로 데려오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간다. 저승의 신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에게 아내를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오르페우스. 그의 연주를 들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페르세포네는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의 뒤를 따라갈 거라 약속하고,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에게 이승으로 나가기 전에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오르페우스가 이승으로 나가는 출구 바로 앞에서 약속을 잊고 에우리디케가 따라왔는지 뒤를 돌아본 순간,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사라진다.

뮤지컬 <Hadestown>은 이 같은 그리스 신화의 줄거리를 현대의 배경으로 가져온 작품이다.


그 자체만으로 극의 모든 이야기를 품은 듯 보이는 무대 장치와 다양한 조명이 재즈 음악과 한데 어울려 종합예술의 품위를 보여주었다.

특히,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헤르메스를 연기한 릴리어스 화이트(Lillias White)의 카리스마와 가창력은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토니 상을 받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이자 영화, 텔레비전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코러스는 다른 뮤지컬에 비해 그 비중이 크고 두드러진다고 느꼈는데, 코러스 중 한국계 배우가 두 명이나 있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안내책자 Playbill에 두 배우의 인사말이 우리말로 적혀있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안내책에서 한글을 보다니,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영원한 노동 속에 자신의 이름조차 잊고 살던 지하세계로부터 연인을 데리고 나와 밝고 따뜻한 세상에서 함께하려던 사랑은 단 한순간의 의심 앞에 이별로 이어지지만, 허무함이 서서히 다가올 무렵 헤르메스는 노래한다. "이것은 오래된 노래지. 슬픈 노래야. 하지만 우린 이 노래를 계속 부르지." 그리고 극의 마지막은 다시 맨 처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기립박수와 함성이 여기저기서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이렇듯 우리는 산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잘 안 되면 다시 해본다. 밤인가 하면 아침이다. 끝은 시작이다.' 함께한 사람들도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했을까. 내가 받은 희망의 메시지를 그들도 받았을까.


며칠 전 읽은 한강의 <희랍어시간>이 생각났다.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남자가 만나는 이야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이미 일부는 사멸된 언어를 배우는 여자와 가르치는 남자가 만나는 이야기.

여태까지 내가 알던 사랑과 달랐다. 그토록 처절한 사랑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지 못했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비로소 두 사람의 내면이 맞닿으며 소설은 끝이 난다.

끝은 시작이다.


생명의 동력, 사랑의 상징으로 일컬어지곤 하는 심장은 우리 가슴 한가운데 있다. 심장은 일정하게 움직여 생명수와도 같은 혈액을 온몸에 전한다. 그 붉고 힘찬 에너지가 우리를 살게 하고 사랑하게 한다.

강하고 열정적인 사랑의 속성은 살아있음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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