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생활 3주 만에 드디어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뒷마당에 사과나무도 있는 밝고 아담한 집이었다. 태어나 처음 살아보는 마당 있는 집이었다. 서울 아파트보다 훨씬 넓어진 공간에서 아이들은 몹시 즐거워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남편과 나에게 이것저것 집 관리는 그야말로 도전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살게 된 집의 주인이 깐깐하기로 소문이 자자해 더욱 신경이 쓰였다. 당장 마당의 잔디를 깎는 일도 경험이 없는 우리에겐 쉽지 않았다. 살짝 비탈이 진 집 옆면의 잔디를 깎기가 특히 힘들었다. 그럴 때면 마치 히어로처럼 어디선가 누군가가 나타나 잔디 깎는 기계 사용법이나 잔디 깎는 요령을 알려주곤 했다. 낯선 나라 낯선 문화 속에 내던져져 당혹스러웠던 시절을 함께해 준 이웃과 친구들, 내게 선물 같은 사람들이었다.
직접 구운 쿠키를 나눠주고 우리 아이들을 예뻐해 주던 옆집 메리 할머니와 네이든 할아버지, 자연주의자라며 잔디를 깎지 않아 정원이 울창한 집에서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살던 뒷집 존 아저씨, 이웃을 모두 초대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 주었던 제니, 모두 정다운 이웃이었다.
옆 집 네이든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워싱턴 D.C.에서 연방 공무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 우리나라에 대해 잘 알고 관심도 많았다. 이삿짐 정리로 정신없던 내가 갓 네 살이 된 둘째와 함께 지내는 것을 보고는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프리스쿨을 추천해 주기도 했다. 너무 바쁜 나머지 둘째가 다닐 곳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던 우리는 그가 알려준 'Learning Tree'라는 예쁜 이름의 프리스쿨을 방문했고, 바로 다음 날부터 둘째는 이곳에 다니게 되었다.
다른 이웃들도 길에서 마주치면 새 집에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아이들 학교 생활은 어떤지 처음 온 동네에서 뭐 불편한 건 없는지, 언제나 물어봐주고 우리의 새로운 생활을 축복해 주었다. 이들의 따뜻한 관심과 이방인에 대한 열린 마음 덕분에 우리 가족은 별로 힘든 것 없이 서서히 동네 주민의 일원이 돼가고 있었다.
미국에 와 처음으로 살던 오리건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 ⎯ 자동차로 두 시간만 달리면 태평양이 보이고 시가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숲이 울창한 곳이었다. 곳곳이 산길이라 꼭 곰이 나올 것 같을 때도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많지 않던 시절, 산 길에서 헤맨 기억은 아직도 아찔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포틀랜드에서 살다 시카고로 갔을 때 느꼈던 황량함은 포틀랜드의 경관이 얼마나 빼어나게 아름다웠는지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영하의 기온이 거의 없어 눈이 오지 않는 포틀랜드의 겨울에 어쩌다 눈이 오면 온 동네가 축제였다. 아무도 며칠이고 눈을 치우지 않았고 누구든 썰매를 가지고 나와 어디서나 탔다.
'어디나 처음으로 살게 되는 곳이 고향이죠', 누군가 내게 해줬던 말이 생각난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살던 서울, 그리고 고향을 떠나 처음으로 살아본 포틀랜드 모두 내겐 고향이다.
집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나는 전임자 가족이 두고 간 차를 운전해 학교와 마트 등을 다니며 열심히 길을 익혔다. 그들은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들이 처분했어야 할 차를 그대로 세워놓고 가버려 우리를 곤혹스럽게 했지만, 나는 차라리 새 차가 생길 때까지 길을 익히는 데 쓰자 생각했다. 가끔씩 운전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멈춰 서기도 하고 시동이 안 걸릴 때도 있는 위태위태한 차였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몰고 여기저기 다녀보았다.
기동력이 생기니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새로운 생활의 적응에 훨씬 속도가 붙는 느낌이었다. 친구들보다 늦긴 했지만, 둘째가 태어나자마자 운전면허를 따놓은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몇 번이나 생각했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찾아보다 발견한 딜러샵에 두 시간을 달려가 마침내 내 차를 사던 날, 나는 날아갈 것 같았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힘이 났다. 자동차는 이곳 서버브에선 필수품이자 우리 같은 이방인에겐 날개 같은 존재였다.
지인들을 초대해 집들이도 했다. 남편의 회사 동료들과 영어 클래스에서 알게 된 내 친구들이 손님의 대부분이었다.
결혼 후 줄곧 일한다는 핑계로 엄마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살림을 했던 나는 할 줄 아는 음식이 별로 없었다. 이웃에 레시피를 물어보기도 하고 국제전화로 어머니들을 귀찮게 하면서 겨우겨우 밥상을 차려냈다.
한 번씩 손님을 치르고 나면 부엌은 마치 폭탄 맞은 것처럼 난장판이 되곤 했다. 내가 만든 음식들의 레시피를 모아 기록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레시피 노트는 이제 많이 낡아 너덜너덜해졌지만 아직도 주방의 소중한 도우미가 돼주고 있다.
그렇게, 감당 못할 줄 알았던 시간들을 나는 이러구러 살아내고 있었다.
* 프리스쿨(preschool): 주로 3-5세 아동이 학교 교육과정 전에 다니는 사립 교육기관이다.
만 5세가 되면 공립학교인 킨더가튼(kindergarten)에 입학하여 K-12, 즉 킨더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의 의무교육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