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책스타그램을 십여 년 하고 있다. 십여 년 전 책스타그램 인친들 중 몇몇을 아직 이어오고 있다. 그중에 책표지, 펜화, 민화를 그리시는 인친이 있다. 종종 펜화를 올린다. 날카로운 닙펜을 이용한 그림을 보면 날카롭고 가는 선이 흔들림 없이 인물의 명암을 가지고 있으면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그가 올리는 책 이야기도 좋지만, 그림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팬이 되었다. 그분이 가끔 민화도 올리고 전시회 소식도 전한다. 미술책에서 마주한 민화가 아니라 물성의 민화를 사진으로 만나니 색감이 나쁘지 않다. 민화를 검색하지 않지만 가끔 전하는 민화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느 날, 청소년 친구들 엄마들이 모여있는 흔히 학모 모임 단톡방이라는 곳에 전시 소식을 전하는 메시지가 떴다. 민화 전시다. 어라, 이 분이 민화를 하셨나? 혼자 하는 전시는 아니고 그가 가르치는 수강생들과 함께 하는 전시란다. 크게 멀지 않은 거리다. 작은 다발의 꽃을 들고 전시회로 나섰다. 그가 나를 반겨줬다. 한 바퀴 혼자 둘러봤다. 나는 미술관 나들이를 즐기지 않는 유형이라 무엇을 봐야 하고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무례하기 그지없는 질문이었을 테다. 하나도 몰랐으니 그랬을 수밖에. 그림 그리는 방법을 물어본다기보다 기술을 물어봤던 것 같다. 방법은 일련의 과정이라면 내가 물어본 기술은 이 분은 배운 지 얼마나 되었어요?라는 무례하기 짝 없는 질문. 색칠이 거칠거나 부자연스러운 몇몇 작품에 대해 물어봤던 것 같다.
그러다 눈길을 끌던 작품이 있다. 작품 크기는 B4 정도. 여백이 많고 연꽃 한 두 송이에 연 잎이 있는 그림이다. 크기의 1/4만 차지한 그림이었다. 이 그림이 하나가 아니라 3 개 연달아 걸려있으니 화려하지 않아도 거실이나 현관 복도에 걸려있다면 어여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화는 예쁘다 보다 어여쁘다에 가깝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민화를 배울 수 있나요? 저녁반도 있나요? 이 그림이 예뻐서요. 저 이런 그림 그려보고 싶은데요.
호기로움과 호기심으로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이 말 한마디가 나를 어떤 영역으로 끌어들일지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