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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치욱 Sep 30. 2022

내가 맡은 작품 #9 <초록밤>

[기본 정보]

제목: 초록밤(Chorokbam)

감독: 윤서진

출연: 이태훈, 김민경, 강길우, 김국희, 오민애, 원미원, 변은영 외

제작: 디파이언트

배급: (주)인디스토리

상영시간: 89분

장르: 미스틱 시네마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 2022년 7월 28일


[시놉시스]

밤이 낮보다 어둡지 않고

낮이 밤보다 밝지 않은

우리 모두가 흩어지고 짙어지는, 여름밤









어떤 영화는 너무 좋은 작품이지만 작품 전체를 감싸는 음울한 정서 속에 나만이 가진 우울을 자극하는 트리거가 되는 장면이나 상황이 있어서 다시 마주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 내가 맡은 아홉 번째 작품인 <초록밤>이 그랬다.


<초록밤>의 킥오프 회의 때 회의에 참석한 많은 분들이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공감했던 영화 속 에피소드로 속물적 본심과 애도의 마음이 교차하는 장례식장 상황을 꼽았다. 특히 참석자 중 중장년이신 분들께서 크게 호응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내가 이 영화에서 깊게 몰입하고 공감했던, 그래서 다시 이 영화를 마주하기 힘든 상황은 극 중 야간경비원 일을 하는 '아버지'가 새벽에 아파트 단지에서 자살을 하려다 관두는 지점이었다. 영화가 '아버지'의 자살 철회를 묘사하는 방식은 다른 영화들과 무척 달랐다.


극 중에서 '아버지'는 삶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참기 힘든 유혹에 잠시 목을 내어주지만 이내 용기가 없었던 것인지 가장의 책임감이 가로막은 것인지 자살시도를 멈춘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가 경비실에서 다시 별 볼일 없는 아침을 맞이하는 것으로 장면이 이어지는데, 나는 너무 놀랐다. 내가 과거에 어떤 이유로 자살하려다 그만두고 다시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의 아침을 맞이했던 순간의 감정 그리고 입장과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마음 속 내밀한 곳을 파고드는 영화는 온전히 다시 마주하기 힘들다. 그래서 힘들었냐고 물어본다면 싱겁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업무를 위해 영화를 종종 다시 봐야 했지만 업무상 영화를 볼 때는 빠른 배속으로 보거나 몇 장면들은 스킵하는 경우가 많고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영화를 '꺼내보기' 때문에 감정의 소모는 매우 적다.




다만, <초록밤>은 힘들다기 보다는 어려운 영화였다. 영화의 홍보 방향성을 잡는 일부터 쉽지가 않았다.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한 끝에 탄생한 이 담대한 작품은 그래서인지 강조할 점도 많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다. 마치, 영화를 소개가 아니라 영화 언어를 번역하는 일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는 특히 우리 대표님께서 방향을 잘 잡아주셨기 때문에 마케팅 포인트가 다른 곳으로 새는 일 없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나는 초반에 이 영화의 보도자료를 쓰면서 사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잘 모르겠더랬다. 그래도 대표님께서 늘 작성된 글을 검토하고 피드백해주셨기 때문에 점차 수렴되는 곳으로 방향을 잡아서 그리 오래 헤매지 않고 내 업무를 제대로 해나갈 수 있었다.


특히, 대표님이 구상해 삽입된 메인 포스터의 카피라인 '삶을 애도하는 모두의 시간'은 내가 맡은 영화들 가운데서도 가장 좋아하는 카피라인 중 하나다. 영화가 보여주는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 그리고 색으로 표현한 양면성 등이 하나의 문장으로 집약된 깔끔한 카피라인이었다. <초록밤>의 홍보마케팅 업무는 단순히 양적으로는 내가 거의 주도적으로 리드했지만 컨셉이나 방향성 등 '정수'에 해당하는 부분은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이신 우리 대표님께서 책임지셨고, 나는 또 옆에서 많이 배웠다.




이렇게 <초록밤>은 어려운 영화였지만 일하면서는 무척 즐거운 마음이었다. 거기에는 영화에 참여한 모든 분들을 '스탭' 대신 '크루'로서 여기고 하나의 팀으로서 존중하는 윤서진 감독님의 마음이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러 인터뷰에서 윤서진 감독님은 영화를 만들면서 스스로의 힘을 다른 스태프에게 분산하고 함께 만드는 즐거움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이야기했다. 감독님의 그러한 마음은 영화의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은 우리 홍보마케팅 스탭에게도 전해졌다.


사실 홍보마케터는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 관객들을 만나는 일에만 관여하기 때문에 영화의 엔딩크레딧에는 올라가더라도 그 영화의 팀원으로서는 온전히 고려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다.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홍보마케팅 부문을 찾기 힘든 이유도 그런 것 같다. 반면에 감독님은 홍보마케팅사의 직원인 나에게도 팀원으로서 존중의 마음을 보여주셨는데, 그래서 업무를 하는 마음이 보다 더 즐거울 수 있었다.




<초록밤>은 모두가 한 팀으로서 즐겁게 만들고 소개한 영화였고,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관객을 충분히 모으지 못했다. 당연히 내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탑건: 매버릭>이 극장의 존재가치를 다시금 증명하는 역할을 한 영화라면, <초록밤>은 '블록버스터와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영화를 구성하는 것들과 스크린의 쓸모를 생각하게'(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하는 영화다. 두 영화의 흥행 정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작품이 가진 고유성 그리고 영화다움만큼은 관객수로 인해 평가절하될 수 없음을 적극적으로 변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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