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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치욱 Sep 30. 2022

기다리는 자에게 (일)복이 있나니

진심을 다하다 보면 만나게 되는 영화로운 날들

고백컨데, 나는 입사하고 2주 만에 회사를 관두려고 했다. 당시 회사의 상황은 마땅한 사수도 없었는데 제법 큰 규모의 독립영화를 진행하고 있었고, 나는 업무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그야말로 말하는 감자였지만 당장 현장에 투입되어야 했다. 이렇게 체계도 없이 계속 맨땅에 헤딩 식으로 일 하는 게 맞는 건가 하는 강렬한 의문이 들어서 그만둘 거라면 수습 기간에 그만둬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따로 사직서를 작성해 가슴에 품고 회사를 다녔더랬다.


친구들한테, 심지어는 동료들한테도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었는데 결국 스스로 마음을 돌리고 이왕 선택한 길인데 버티다 보면 의미있는 경험으로 남지 않겠냐는 생각에 계속 다녀보기로 결정했다.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혼란스럽고 정신없었던 시간은 일하면서 다시 찾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업무를 해나가면서 점차 루틴을 익혀갔고 어려운 상황은 동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헤쳐나갔기 때문에 그래도 침착하게 직장생활을 돌파(!)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입사 초의 혼란에서 벗어나 침착하게 업무에 적응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후 맡았던 영화들이 독립영화들 중에서도 규모가 크지 않은 영화였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소박한 영화들을 맡게 되면 홍보마케팅의 사이즈 역시 크게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에따라 맡아야 할 업무도 하중이 많지 않다. 다만, 이러한 영화들은 관객수 역시 소박한 편이어서 한동안 비슷한 규모의 영화들을 계속 맡다 보니 홍보마케터로서 내가 맡은 작품이 높은 관객수를 기록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갈증이 커졌다. 게다가 명색이 홍보마케터인데 마케팅의 계량적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관객수가 저조한 것에 스스로 아쉽기도 했다.




그렇게 2021년을 소박하게 마무리한 나는 2022년 첫 영화로 정재은 감독님의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맡게 되었다. 그동안 익혀둔 업무 역량을 드디어 발휘할 때가 왔구나! 생각하고 열심히 업무에 임했는데 맡은 영화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것저것 챙겨야 할 프로모션이나 선재물도 많아졌고, 거기서 1년도 되지 않은 사원의 미숙함이 약간씩 티가 나기는 했다. 다행히 배급사 측에서 잘 케어해주셔서 무사히 홍보마케팅을 진행할 수 있었고 내가 맡은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5,000명을 넘기는 관객수를 기록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관객수 6,646명).


그 다음에 맡은 영화가 바로 33,990명의 관객수를 기록한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다. 같은 시기에 회사에서 다른 영화를 많이 진행하지 않아서 온전히 한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음에도 선재물, 굿즈, 방송출연 등 챙겨야 할 일이 무척 많아서 스스로 입사 초 이후 두 번째 심리적 고비라고 느꼈던 시기였다. 경력이 갓 1년 된 나를 시험대에 올린 작품이었달까. 그래도 독립영화가 1만 관객을 넘는 것도 대단한 성취로 느껴지는 요즘 시기에 3만 명이 넘는 관객을 기록한 영화를 맡았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바로 다음 작품은 11,307명의 관객수를 기록한 <모어>였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 영화 역시 나를 무척 바삐 일하게 만들었다. '모어'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광고 소재를 만들어야 했는데 인쇄물 발주 작업에 그렇게 능하지 않은 편이어서 특히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모어>의 1만 관객 돌파를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린 나에게 개봉 1달 만의 1만 관객 돌파 소식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의 기쁜 일이었다.


독립영화로서는 높은 관객수를 기록한 작품을 세 번 연속으로 맡게 된 것이 내게는 그간의 기다림에 대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물론 챙겨야 할 업무가 늘어나면서 스트레스도 받고 피로하기도 했지만 내가 소개한 영화를 많은 관객들이 봐주었다는 사실에 짜릿한 전율마저 느껴졌다.


입사하고 나서 2주 만에 퇴사를 마음 먹었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 마음을 다잡고 계속 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고되지만 보람되고 기쁜 일복으로 돌아온 것 같다. 암래도 재정적 여유가 없는 이곳 영화계에서 인재를 채용한다는 것은 분명 무척 바빠서 일할 사람이 당장 필요하거나 사정이 조금 낫다면 당장은 아니어도 곧 무척 바빠질 예정이라는 시그널일 것이다. 입사를 하고 나서도 차근차근 업무를 익힐 여유가 있기 보다는 바로 업무의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사하고 나서 곧바로 퇴사의 충동이 드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입사하고 나서 며칠을 일했든 몇 달을 일했든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거나 기대했던 바와 직장에서의 현실이 괴리가 크다면 그 회사에서의 지난 시간은 매몰비용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퇴사를 결정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래도 자신만의 어떠한 이유들로 이곳에서 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흐르는 시간에 잠시 몸을 맡기고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들을 맛보는 것은 어떨지 권유해본다. 무식하게 기다리는 일은 미련하다지만 매 순간 진심을 다한다면 어느 날 영화로운 날들을 문득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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