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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치욱 Sep 13. 2022

당신에게 친절을 드려요

사회생활의 공간에 심어놓은 나의 이상주의적 소망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직장생활에서 사과를 참 많이 했다. 거기에는 커뮤니케이션의 중간다리 역할을 하게 되는 영화마케터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도 있고 내가 업무에 미숙했던 신입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입사 첫해를 마무리하면서 '죄송합니다' 대신 '감사합니다'를 더 많이 쓰게 되는, 꽤 잘 기능하는 직장인이 되고자 다짐했지만 그 후에도 종종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나의 정중한 사과는 계속되었다. 특히 어떤 실수는, 내가 뭔가에 씌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스스로도 어처구니 없을 때가 있어서 그럴 때 실수로 인해 폐를 끼치게 된 상대에게 사과를 하면서도 억울함이 한가득 솟구친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오래 해온 사람들은 대개 사과를 남발하지 말라고들 한다. 지나친 사과는 그 사과의 신뢰를 떨어뜨릴 뿐더러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면 대등한 커뮤니케이션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사 첫해의 남발 수준의 사과는 자제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나는 나로 인해 상대가 불편을 겪는 일이 생긴다면 지체없이 사과를 표한다. 내가 부탁을 청해야 하는 입장의 상대이든 혹은 후배이든 간에 관계 없이.




사실 나는 업무로 소통하는 상대에게 적극적인 사과 외에도 최대한 친절하게 소통하려고 노력해왔다. 문의나 요청사항이 있으면 정중하게 질문을 했고, 특히 카카오톡으로 1대1 소통을 하게 되면 문장부호나 이모티콘 역시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소통 방식은 내가 업무로 만난 상대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을 A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1'로 대하는 대신 '000(이름)'라는 사람 그 자체로 상대를 대하려고 했기 때문에 형성되었다.


내가 처음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미숙한 업무능력으로 닥쳐온 수많은 업무를 쳐내기 위해 허둥지둥했다. 아마 함께 일하던 외부의 사람들 입장에서 그런 내가 퍽 답답했을 것이다.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실수를 연발하는 나를 퉁명스럽게 대하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다수였다면 직장생활을 금세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인의 업무도 충분히 힘들고 지칠 텐데 나를 친절하고 존중어린 태도로 대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길지는 않았지만 이 생활을 버틸 수 있는 하나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들의 상냥함은 마치 절망적인 시련에 빠진 어린 브루스 웨인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며 괜찮다며 다독여주는 제임스 고든의 배려와도 같았다.




그래서 나도 비록 업무로 만나게 된 타사의 담당자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건조하게 대하기보다 인격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채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고 싶었다. 내가 입사 초기에 겪었던 일들이 계기가 된 것이기도 하고 원래의 나 역시 친절을 주고 받는 것이 훨씬 좋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업무를 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마음 쓰일 일이 많게 되었다. 내가 조금 더 자세히 요청사항을 설명했더라면 예고편이나 포스터를 작업하시는 분께서 덜 바쁘게 일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후배의 미숙함을 지적하는 것은 좋지만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할 수는 없었을까 등등. 감정을 더 많이 사용하면서 마음이 더 지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학부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관료제의 주요한 특징인 임무수행의 비개인화를 배웠음에도 이렇게 스스로 업무 상대를 '사람1'이 아니라 고유한 개성을 가진 '000'님으로 대하면서 마음고생을 자처하는 모습을 행정학과 교수님들이 본다면 쯧쯧 혀를 찰지도 모를 일이다. 내 소통 방식을 조금은 건조하게 바꿔볼까도 생각했지만 천성이 그렇지를 못해서 이내 맥시멈의 친절을 지향하는 소통 방식으로 회귀하고는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의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를 접하게 되었다.




필즈상을 수상하면서 '수학은 자신의 편견과 한계를 이해해가는 과정'이라는 소감을 남겼던 허준이 교수는 얼마 뒤, 후배와 세상을 향한 사려 깊은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를 전했다. 축사의 말미에 그는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영화마케터로 일하면서 타인을 대하며 전했던 그 많은 언어들 역시 친절을 전달하기 위해 쓰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영화마케터로서 내가 대하게 되는 사람들은 맡은 일은 다르지만 모두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의 가치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느슨하게나마 친밀감을 느낀다.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일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그리고 내가 전하는 친절함이 상대에게 전해지고 그 친절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친절함의 공명이 일어나기를 소망했다.




사회생활의 공간을 친절하고 다정한 기운이 감도는 곳으로 만들고자 했던 내 의도는 순진하기 그지없다.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분들이 내 친절에 응답해주었고 보다 큰 친절을 돌려주었다. 내가 심어놓은 소박한 친절의 씨앗이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누군가 마음 놓을 공간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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