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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daum Jan 28. 2022

어른이 된다는 건,

CHAPTER   2. 나의 아기, 아버지

2️⃣ 나이답게 책임지는 어른으로 살아가는 성장기



나의 속에 둘째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신체 감각이 민감한 탓에 임신 테스트기에도 선명한 두줄을 긋기 전  미리  느낌으로 알게 된 존재.

그렇게 찾아온 아이였다.


나는 힘찬 태동을 느끼며 뱃속에 아기 무럭무럭 키워냈다.

둘째 아가 맞이하기 위한 준비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각종 검사들로 아기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며 순조롭게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던 어느 날,

5개월 무렵 기형아 검사를 의무적으로 하던 그때,

이상수치가 발견되었다.

더 정밀한 검사를 위해  다시 날을 잡고 양수검사도 진행하였다.

그때 마음은.. 너무나 무섭고 긴장되었고 아무 일 아닐 거다. 애써 널뛰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드디어 결과를 듣는 날,

나는  무너졌다.


담당 의사는 뱃속에 아이가 "에드워드 증후군"이라는 병명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라 했다.


선생님., 그게 뭔가요?

고칠 수 있는 거죠?

괜찮은 거죠?


담당 의사 선생님은..

18번 염색체의 이상으로 나타나는 희귀 염색체 질환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선생님은.. 지금 알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라 하면서 포기하라고 조심스럽게 권했다.


우리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내 뱃속에선 아가가 힘차게 움직였다.

며칠을 울고 나는 포기 못한다고 버텼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때 나의 가족들이 진심으로 걱정해주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태어나도  생후 6개월 전에 사망률 90% 달하며 겨우 산다고 하여도 1세를 넘기기 힘들며.. 그래도 살아남는다 하여도 여러 장애를 안고 가야 한다고 냉혹한 현실을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그 아이가 살아남는다면.. 아픈 동생을 평생 첫째 아이가 짊어져야 할 숙제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듣기 싫은 말들이지만 이성을 찾아야 했다.

내손으로 보내주던지, 책임을 지든지 결정해야 했다.


아픈 결정이지만.. 우리 부부는 보내주기로 결정하였다.

마음 저리도록 아프지만 뱃속에서 5개월 살다 떠나보내야 한다는 결정을 내가 스스로 해야 했다.


5개월 넘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이미 너무 커버렸다.

나는 제왕절개 수술과 같은 절차를 거쳐 아이를 보내야 했다.

나는 ..살인자가 된 것 같았다.


마취를 하여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회복실에서 나는 아기를 보여달라고 울며 간호사의 소매자락을 잡아끌었다.

간호사가 말하길.."안 보는게 좋아요.. 보고 나면 평생 못 잊어요.. 저희가 잘 보낼게요,. 좀 더 주무세요"


그리고 나는 의식이 끊어졌다


분명히 수술을 했건만 나는 다른 산모들과 다르게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없었다.

같은 병실을 쓰는 것조차 힘들었다.

1인병실로 옮겼다.

그렇게 5일,  나는  보내야 했던 아기에 대해 미칠 것 같은 슬픔과 미안함과 자책에 한동안 멍 해있었다.


그렇게 나는 뱃속에 아이를 내손으로 보내었다.

퇴원 후, 텅 빈 손으로 집에 돌아와 몇 날 며칠을 허공에 대고 울었다.

동갑내기 남편도 함께 울었다.


마음과 몸이 회복되어갈 즈음, 첫째 딸아이가 묻는다.

엄마 뱃속에 동생은?

그저 입가는 애써 미소 지으면서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아이를 가슴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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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다행히 흘러갔다.

흐르고 흘러 감사하게도 가슴에 묻은 아이와 동일한 성별의 아이가 또 찾아왔다.

이번에는 지켜내리라.

모든 행동에 조심하였다.

나쁜 생각은 거둬내고 좋은 거 예쁜 거 몸가짐을 조심했다.


한번 아이를 보낸 경험이 있는지라 나는 어느새 고위험군 산모가 되어있었다.

의무적으로 양수검사를 해야만 했다.


그날, 어찌나 떨리던지..

뻐근하고 아픈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잘 크고 있다고 한다.

이번엔 지켜내야 했다.  (이 아이가 지금의 모델 같은 둘째 아들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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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내 곁에 아들이 뱃속에서  4개월 무렵,

친정아버지랑 친정엄마, 그리고 아버지의 사촌형제들 모두 해외여행길에 오르셨다.

어른들끼리 친목모임으로 돈을 모으셨는데 그 해에  동남아시아로 떠나셨다.

.

.

해외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아프시단다.

배가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고 대상포진으로 등에선 피가 나고 괴로워하시는 중이라고 연락이 왔다.

현지 병원에 가기 전 우리 엄마는 아무것도 못 먹었던 아버지를 생각해서 바나나라도 드시게 하셨단다.


국제통화로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한의사  형부는 아무래도 맹장 또는 장천공 같다고 의심하였다.

어찌 슬픈 예감은 전부 적중하는지.. 현지 병원에서 장천공이 맞고 면역력  저하로 대상포진도 심하다 하였다.


수술을 바로 해야 했는데.. 낙후된 의료기술을 신뢰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완강히 버티며 한국으로 돌아올 비행기를 기다리셨다.

그 비행기는 이틀 후에나 탈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대기 중인 엠블런스를 타고 응급으로 병원에 가셨다.

그때 나는 살짝 부른 배를 안고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버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깡마르고 흰 수염 덥수룩에 늙고 나약한 노인이 누워있었다.

며칠 사이 눈에 띄게 핼쑥한  모습의 아버지였다.

예전 크기만 했던 아버지는 그곳에 안계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응급으로 수술실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수술실에서 나온 아버지의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다.

담당의사 말이 장천공이 오래되었고 그 상태에서 음식물이 들어와 뱃속 장기들에 다 들러붙어 염증을 일으키고 썩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결국 아버지는  패혈증으로  중환자실에서 4개월가량 투병하시다가 끝내 우리 곁을 떠나셨다.


뒤늦게 알게 된 이야기지만, 당시 아버지가 경영 중이던 건설사 업체의 어려움에  자금난을 겪으며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한다.

그로 인해 과로, 음주, 결국 대상포진으로 독한 약을 드시고 타이밍 최악으로 해외에서 발병하시게 된 것이었다.


한 집안에 가장이 무너지면서  그 집안도 무너지게 되었다.

형님 형님 하던 이들이.. 사장님 덕분이에요~  하던 이들이 돌아서며 돈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빌려준 돈이 있다며 손을 내민다.

순진했던 우리는 그들이 요구하는 돈들을 해주면서 아버지 가시는 길을 정리해드렸다.

아버지가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대학도 보내주고 결혼도 시켜주었던 친 남동생조차도.. 손을 내밀고 등을 돌렸다.


착하디 착한 친정오빠는 몇 년에 걸쳐 그 정리를 도맡아 해 주었다.. 집은 빚더미에 앉았다.


나에겐 한없이 강하고 컸던 아버지였다. 그리운 아버지..

그래도 살아야 했다.

혼자 남겨진 엄마가 무너지지 않게 삼 남매가 뭉쳐야 했다.

그렇게 우린 엄마 곁을 지키며 버텼다.


아버지 장례식 때 , 내 뱃속에 아이는 7개월 즈음되었다.

홀로 남은 엄마 생각에 눈물 많고 정 많은 막내딸인 나는 이사를 결심하고 다시 엄마 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갑작스러운 원치 않는 아픈 경험으로   또 한 번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

.

CHAPTER   3.  남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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