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daum Jan 27. 2022

어른이 된다는 건,

CHAPTER   1.   어른이 되기 전,

1️⃣ 나이답게 책임지는 어른으로 살아가는 성장기



1978년 나는 1남 2녀 아주 평범한 집안에 막내딸로 세상에 나왔다.


당시 시대상이 그렇듯 생활력 강한 어머니와  가부장적인 아버지.  똑똑한 4살 터울 언니와 착한 2살 터울 오빠.

그리고 세상 어리광쟁이 막내딸인 나.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구성의 집안이었다.


내가 태어나 처음 살던 집은  서울 변두리 쌍문동  수유리라고 들었다.

당시 우리 집은 주인집 아래 달려있는 작은 사궐세방에 우리 네 식구와 아빠의 다 큰 남동생(삼촌)까지 얹어 총 5 식구가 한방에 살았다고 한다.

아마 그  시절에는 시동생 한 명 정도는 거둬주어야 했던 시절 같다. 특히 맏며느리라며.. 당연히 희생이 강요되었던  시대.

내 기억으로 어린 시절 엄마를 보고 "저렇게 희생하지 않을 거야"라는 마음이 한구석에 움텄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단편적  기억으로는 아빠가 사 오시는 통닭 봉투. 바나나. 파인애플. 해외에서 들여오던 데니쉬 쿠키  같은 양철통들이 기억난다.  제법 능력이 있는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니셨다.  경북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ROTC 사관학교를 나와서 당시 엘리트였다고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기업에 장교 출신에.. 근데 왜 남의 집 셋방살이를 했을까  싶다.

음.. 아마도 줄줄이 딸린 아버지의  동생들과 맏이의 어깨 짐도  한몫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늘 푸념 섞인 엄마의 입을 빌리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 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딱히 크게 없다.

아쉽게도..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늘 어렵고 불편하기만 했던 존재였다. 술과 동료들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또 한 번 "난 엄마처럼 아빠 같은 남자랑 결혼 안 할 거야"

마음속에 넣어놓던 다짐들이었다.


바지런했던 엄마 덕분에 우리 집안은 조금씩 조금씩 형편이 괜찮아졌다.

수유리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다시 송파동으로   송파동에서 용인 수지로.. 지금 나이가 들어서 보니 송파동에서 멈췄어야지 ~  싶다.  집값이..  뒤로 엄청나게 올랐다.


삼 남매도  무난하게   사고 치는 것 없이 잘 자랐다.

첫째 언니는  명문여대를 입학하고 둘째 오빠도 서울 4년제 대학에 수월하게 들어갔다.

자식이 잘 되면 부모는 자랑거리가 하나 늘어난 것이다.


그 자랑거리에서 브레이크를 건 것은 바로 막내딸.. 바로 나였다.


1997년 나는 그저 그런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에 대한 기대도 열정도 없던   막내딸... 

집안에 돌연변이 막내딸 등장이었다!  첫째와 둘째에 비해  한없이 낮춰야 했던  막내딸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  

아마 어디 내놓고 얘기하기 부끄러우셨을 것 같다.


그 당시에 나는 부조리한 입시미술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품은 19살 시기를 건너며 사회에 불평. 불만을 뿜어내던 그저 그런 어린 대학생이었다.


왜! 내 그림이 더 잘 그렸는데 내가 떨어지고 저 아이가 붙었지?

왜! 전국연합 시험에서 내가 우수작으로 책에 수록되었는데 나는 4년제 원하는 대학에 못 갔지?

왜! 왜! 왜!


미대라 하면.. 창의성과 테크닉과 그런 걸 봐줘야 하는 거 아닐까? 왜.. 성적 따위를 보는 거야.

젠장 공부 좀 할걸..

하! 지금 돌아보면 근거 없는, 힘없는 반항 끼였다.


그렇게 문턱 높은 서울. 경기권의 4년제 미대를 차례로 낙방하고 용인 언저리에 있는 전문대에 들어갔으니  신입생 시절   대학생활이 즐거울 리 없었다.


그 당시 보이쉬한 이미지에 꽂혀 쇼트커트 머리에 270 사이즈 워커를   신고  걸 크러쉬 뿜 뿜 하던 흑역사도 마음 한편에  숨겨두었다.


무미건조할 만큼 재미없는 대학시절,  기억에 남는 것은 술과 친구들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 학기 학점은  올 F.  

지금 생각하면 비싼 등록금 낭비하는 철딱서니 눈곱만큼도 없는 막내딸이었다.  

기왕 낙제점수받을 거 올 F!라는 허세도 부렸던

재수탱이였다.

그 당시 강남 바닥에 건설사 업체를 운영 중이시던 아버지가 나에게 딜 하셨다.

"너 학교 졸업은 할 거니? 할 생각 있다면 이번 한 번은 아빠가 크게 한번 술 마셨다고 생각하고 다시 기회를 줄게"


나는 죄송한 마음 절반, 두려움 절반 상태에서 대답하였다.

"네한번 더 해볼게요. 죄송해요 아빠.."


다시 생각해보아도 우리 아버지  통 큰 건 알아줘야 한다.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은 200만 원을 넘겼다.  리스펙

그때 사실 아버지가 조금 멋져 보였다.


그렇게 아빠와 나는 둘만의 거래로 수강신청 재등록을 하고 무사히 졸업까지 하게 되었다.

.

.

시간이 흘러 나는 졸업을 하였,  24살 아가씨가 되었다.

직장생활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나도 곧 티브이에서 보던 커리어우먼 같은 느낌에  멋들어지게 살겠지? 막연한 꿈도 꿨다.


그러나,


현실은.. 첫 급여 50만 원 남짓 보육교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인정 욕구를 담보로 열정 착취였던 것 같다.

그 돈을 받으며 5년 정도 관련 직종에 몸 담았다.

최종적으로 퇴사할 땐 마지막 급여가 120이었나?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그만큼 하는 일에 비해 급여는 박했고, 책임은 무거웠다.

아무리 내가 잘해도 간혹 티브이에 뉴스거리로 등장하는 아동학대범들의 이야기.   보육교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방송되었다.

열심히 하여도 그런 이미지와 책임은 20대 초반 성인이 몇 년을 이어나가기엔 버거웠다.


그나마 내가 케어했던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졸업 후, 길가에서 만났을 때  반가워하는  그 아이들과 부모님들에게   감사했고 내가 헛 산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특별한 이벤트 없이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남매 중에 첫째는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탄탄대로 교사생활을 하고 의사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아무리 해도 쫓아 갈 수 없는 첫째 언니에 대한 넘사벽이다.


그러다 2003년 어느 해,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의 지인과 썸이라는 것을 타게 되었다.

동갑내기 그 친구와 나는  약 6개월가량 사귀고 무엇이 급했는지 우리는 인생에 큰 획을 그으며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었다.

둘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선택한것이다.


26살에 결혼한 어린 신랑 신부가 소꿉놀이하듯 가정을 꾸렸다.

결혼하고도 나의 직장생활은  계속되었는데 결혼 1년 뒤 임신을 하게 되었고  28살에 첫째 딸아이를 낳게 된다.

하.. 세상 모든 엄마가 그랬듯이 나 또한 좌충우돌 부딪히고 깨지고 그러면서 육아를 배웠다.


예민한 아이는 손에서 놀고자 했고 아픈 손목. 허리에 아이를 업고 서서 밥 먹기 일쑤였다.

동갑내기 어린 남편 또한 늦은 퇴근으로 도움을 주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나는 대화가 하고 싶었다.

른과 대화하고 나의 하루를 나누고 싶었다.

그 시절  나는 마음이 참 힘들고 어려웠던 것 같다.

독립심 강한 성격 탓에 혼자 어찌 되든 해결하고 팠는데.. 이건 정말 도무지 답이 없었다.


서러웠던 일화 중에..

자장면을 좋아하는 내가  후딱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배달음식을 시키면 귀신같이 깨어서 울어재끼는 첫째 딸.

서서 마시듯 먹어치우는 자장면에 왜 이렇게 목이 메는지,

그렇게 매일을, 끼니 거르며 어쩌다 먹는 식사는 서서 먹어야 했고 잘 때조차  내 배 위에서 자야 했던 첫째였다.


그러다 드디어 폭발하였다.

서럽고 그립고 후회되고 무서웠다.

그리고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너무 아파. 엄마..  나 너무 힘드러~  으앙"


울먹이는 내 목소리에 근거리 사시는 친정엄마가 출동..

친정엄마가 남편을 쏙~ 빼닮은 딸아이를 안아주고 나는 그렇게 식탁에 앉아 눈물 젖은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시간이 답이다~다 그렇게 큰 거야~  어서 먹어~"  엄마의 말을 으며..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요녀석이 예민했던 첫째 딸이다


하루하루 내가 익숙해지듯  아이도 자랐다.

 아이가 세 살 정도 되자 살만해졌다.

그맘때 용인 수지 친정 곁을 떠나 인천 계양구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바로 직전 친정언니 집 근처로 이사를 하면서 내 집 마련의 행복도 이때 처음 느끼게 되었다.

친정언니 근처에 살면서  어느 정도 살만해졌을 때 우리는 둘째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속에 둘째 아이가 5개월 되었을 무렵.. 나의 인생에서 첫 번째 상실감을  겪게 되었다..

.

.

.

CHAPTER  2.   나의 아기 , 아버지  


이야기를 기다려주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