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묘비명: 아름답게 가리라

릴케, 박인환

by 설애

시를 쓰다가 허망하게 떠난 시인들이 있다.


릴케의 장미

릴케(1875-1926, René Karl Wilhelm Johann Josef Maria Rilke)는 프라하에서 출생한 유명한 시인이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나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말테의 수기>, 카프카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엮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로도 알려져 있다.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하게는 백혈병인 것을 모르고, 연인에게 줄 장미를 따다가 찔려 패혈증에 걸려 사망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의 묘비명은 그가 직접 쓴 것이며, 그의 죽음에 영향을 준 장미가 언급된다.


"Rose, oh reiner Widerspr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 번역: 독문학자 겸 비평가 김주연


묘비명의 눈꺼풀은 장미의 꽃잎에 비유되어, 장미와 같은 아름다운 삶에서 잠들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글이라고 해석된다. 그의 시 하나를 옮겨 본다.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릴케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테니까.




세월이 가면

박인환 시인(1926-1956)의 묘비는 그의 시, <세월이 가면>의 일부가 적혀있다. 박인환 시인은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한 뒤 서울로 내려와 종로에서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마리서사에서 많은 문학인들과 교류했는데, 박인환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도 반말하듯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박인환 묘비명

그는 이상의 기일에 맞추어 시를 쓰고 3일간 폭음한 뒤 심장바비로 사망한다. 시인의 풍류인지, 29세 나이에 부린 객기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상의 기일은 4월 17일인데, 시는 3월 17일이라고 되어 있다.

그의 시를 읽고 나는 그가 40대는 되었으리라 생각했는데, 29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쓴 시라고 생각하니 김수영 시인이 그에게 "겉멋만 든 허접쓰레기"라고 했다는 비판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시를 소개한다. 시(한문은 한글로 옮겼으나, 이상의 이름은 그냥 두었다. 또한 제목은 술에 취해서인지 '죽은 아폴롱'이라고 적혀있었다고 하는데, 아폴론이 맞는 듯하다.)에서 나오는 마유미는 이상의 소설 <지주회사>에 등장하는 인물이고, <제비>는 이상이 운영한 다방이다. 이상은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현재에서도 김재희 작가에 의해 소설로 되살아나고, 나는 그 소설을 내 브런치 첫 번째 글로 올렸었다. 박인환 또한 그를 기리며, 그에게 헌시를 했다.


[참고. 이전에 이상에 대해 내가 적은 글]

https://brunch.co.kr/@snowsorrow/2




<죽은 아폴론> - 이상 그가 떠난 날에


박인환


오늘은 삼월열이렛날

그래서 나는 망각의 술을 마셔야 한다

여급 마유미가 없어도

오후 세시 이십오 분에는

벗들과 제비의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그날 당신은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

허망한 서울의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운명이여

얼마나 애타운 일이냐

권태와 인간의 날개

당신은 싸늘한 지하에 있으면서도

성좌를 간직하고 있다.

정신의 수렵을 위해 죽은

랭보와도 같이

당신은 나에게

환상과 흥분과

열병과 착각을 알려주고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문학에

따뜻한 손을 빌려준

정신의 황제.

무한한 수면

반역과 영광

임종의 눈물을 흘리며 결코

당신은 하나의 증명을 갖고 있었다

「李箱」이라고.



어떤 인물, 어떤 정신은 죽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릴케가 바랬던 '누구의 잠도 아닌 잠' 혹은 '잠들지 않는 잠'은 이런 죽지 않는 영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박인환에게 영향을 주었던 이상처럼,

내가 죽어도,

내 영혼은 살아남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한 자 남긴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14화#13 묘비명: 안식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