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패닉
1995년 [왼손잡이]와 [달팽이]가 담긴 패닉 1집이 발매된다. [달팽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피곤함과 달팽이와의 조우, 바다로 갈 거라는 꿈의 가사를 펼친다. 내가 이 노래를 꺼낼 때는 녹초가 되기 직전이다. 녹초가 되면 노래도 소음이 되어버린다. 녹초가 되기 전 나를 다독이며 꿈을 꾸는 순간을 함께 하는 노래다. 이런 느낌은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다. 다시 지은 밥처럼 매번 새롭고, 그렇게 따뜻한 힘을 준다.
나는 공부를 잘했다. 우수한 대학의 간판을 달고 대학교 때는 과외를 했다. 내 생활비를 끊어버리고, 장학금을 받아 등록금도 필요없었던, 자랑스러워하던 딸의 대학을 은행에 내놓은 울 아버지 덕에 나는 만져보지도 못한 학자금 대출을 갚으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최악은 아니지만, 나는 끝없이 수렁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친구들이 스키를 타고, 어학연수를 가고, 해외여행을 가는 동안 나는 과외비, 통장 잔고, 남은 빚을 비교해 가며 동동거리며 살았다. 공부할 시간이 없어 내 학점을 챙길 여유도 없었다.
과외는 한 달에 5~6개를 했다. 주말에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아침 8시에 나가서 밤 12시에 돌아왔다. 자주 아팠고, 자주 지쳤다. 학자금 대출이 끝나면 다른 무언가가 나를 삼킬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사나, 이런 질문들이 자꾸 밀어내도 돌아왔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잠이 들어 종점까지 간 적도 있었다. 막차에 혼자만 타고 있어 기사님이 내달릴 때도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피곤했어도 하루를 끝냈다는 안심이 있었다. 그 길을 종종 [달팽이]가 함께 했다.
누군가는 20대로 돌아가고 싶다지만, 난 싫다.
그 대신 곁에서 이 노래를 같이 흥얼거려 주리라.
가능하다면 잘하고 있다고,
미래에 이쁜 딸과 멋진 아들이 있다고,
네가 잘 살아주어 내가 있다고
감사 인사를 하리라.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내 모든 걸 바쳤지만
이젠 모두 푸른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모두 잊게, 모두 잊게 해 줄 바다를 건널 거야
[가사 전문]
작사: 이적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
좁은 욕조 속에 몸을 뉘었을 때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내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줬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모두 어딘가로 차를 달리는 길
나는 모퉁이 가게에서
담배 한 개비와 녹는 아이스크림
들고 길로 나섰어
해는 높이 떠서 나를 찌르는데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어느새 다가와 내게 인사하고
노랠 흥얼거렸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내 모든 걸 바쳤지만
이젠 모두 푸른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내게 남아 있는 작은 힘을 다해
마지막 꿈속에서
모두 잊게, 모두 잊게 해 줄 바다를 건널 거야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