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만나게 될 사람과는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는 말을 믿는가?
나는 이 말은 믿지 않지만, '사람'을 '책'으로 바꾼 말은 믿는다.
만나게 될 책과는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
몇 년 전, <혼자 책 읽는 시간>을 읽을 때도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다 마음먹은 대로 해낼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인 '시간'과 '선택'의 탓으로 이 책은 내 인생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고, 그 안에 있는 도서를 찾아 읽는 과정에서 나는 운명처럼 이 책을 또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지나치지 않았다. 참, 감사한 일이다.
주인공은 8 가구가 사는 주택의 수위인 여자 르네와 세상에 심드렁한 천재 소녀 팔로마, 그리고 새로 이사 온 지적이고 부자인 일본인 남자 가쿠로이다.
르네는 자신이 책을 많이 읽어 똑똑하며, 도서관에서 철학도서도 빌려 읽고,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 우아한 여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수위로 산다. 심지어 이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TV를 켜놓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장바구니에 숨긴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의 우아함을 숨기며 사는 것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시작이다.
팔로마는 부유하고 사교적인 집안의 딸로, 속으로 무시하는 언니가 있으며 언니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경멸하는 천재 소녀다. 스스로 자신이 '아주 특출 나게 똑똑하니까.'라고 표현하는 아이이다. 팔로마는 '실존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라면, 눈부신 성공이 실패보다 나을 게 없지 않은가.'라고 시니컬하게 세상을 바라본다. 팔로마의 천재성을 나타내는 부분을 옮겨본다.
이 문장은 무능력자가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현실보다 더 힘들고 부당한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행동으로써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써 힘을 갖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언어로 지배하는 것이 궁극의 능력인 세상에 살고 있다. 정말 끔찍하다. (중략) 그러니까 말만 잘하는 사람들한테 농락당한다. (중략) 이는 우리의 동물적 본성에 있어 아주 끔찍한 상처이며, 일종의 타락이자 깊은 모순이다.
p75
나는 문법이란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고 읽고 쓸 때 아름다운 문장을 읽거나 내가 직접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적어도 아름다운 표현이나 멋진 문체를 알아볼 수는 있다. 하지만 문법을 알고 나면 아름다운 언어의 또 다른 차원에 도달한다. 문법을 안다는 것은 언어의 껍질을 벗기는 것,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는 것,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완전히 벗은 언어를 보는 것이다. (중략) 나는 언어의 기본 개념, 명사와 동사가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본다. (중략) 언어의 황홀경도 아름다움도 알지 못하는 영혼이 가난한 불쌍한 사람들.
p219 ~ 222
팔로마는 르네의 우아함을 조금 눈치채고 있고, 르네에게는 차를 같이 마시는 르네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는 친구 마뉘엘라가 있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인 가쿠로
가쿠로는 르네가 숨기는 우아함을 알아채고, 가쿠로는 팔로마의 도움을 받아가며 르네가 숨기는 우아함을 드러낸다.
르네의 우아함을 표현하기 위한 책들, 영화들, 그림들 그리고 일상을 표현하고 뒤트는 방식들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풍부하게 해 준다. 그 외에도 이 책은 다른 책과 다른 특징들이 있다.
책 속에 숨어있는 작은 연작이 있다.
액자 소설이라는 뜻이 아니라, 팔로마가 쓴 연속되는 이야기가 목차에 표시되어 있다. 목차에 표시된 [심오한 사고]와 [세계 운동에 대한 고찰]을 다시 이어 읽어볼 생각이다. 처음 목차를 보고, 연작이 2개인 줄 모르고 숫자가 뒤죽 박죽이어서 해설과 요약, 옮긴이의 말을 찾아 도움을 얻으려고 했으나 모두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서문 해설과 요약, 옮긴이의 말이 없다.
그 이유는, 책에서 찾아냈다.
평소 나는 독자를 교조적 쇠창살에 가두는 서문 해설이나 요약을 경멸했다.
p72
그 교조적 쇠창살을 찾아 해매던 나에게는 벼락같은 문장이었다.
반전이 끝까지 있다.
어떤 반전이 소설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책은 다 읽을 때까지 절대로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 그 반전으로 인해 이 이야기들은 기억의 어느 벽을 넘어서 깊이 저장되어 버렸다.
어떻게 이 우아한 소설을 나의 미약한 필력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책의 미로> 스물아홉 번째 책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