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상선암 수술 후기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장마가 시작된 무렵에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수술 전날에 입원을 해야 했다. 필요한 짐들을 챙겨서 신랑과 기차에 올랐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갈 때면 언제나 여행하는 느낌이 들어 들뜨곤 하는데, 역시나 이번엔 기차역에 가는 발걸음부터 무거웠다. 신랑과 각자 이어폰을 착용하고 나는 적당히 발랄한 음악을 들었다. 멍하게 창밖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기 어려운 사실에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나왔다. 어이가 없어 웃은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웃음이 난다는 것이 다행이기도 했다. 병원 원무과에 들러 입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로 향했다. 병원에서 일하는지라 병실 풍경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환자로 입원실에 들어오니 기분이 묘했다. 입원 첫날에는 딱히 하는 것은 없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주사 바늘을 피부 밑에 찔러 항생제 반응을 보고, 다음날 수술이 예정된 환자들이 모여 수술과 치료에 대한 시청각 교육을 받았다.
특별히 아픈 처치가 없어서 수술 전날에는 마치 캠핑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히려 기분이 조금 들뜨기도 했다. 6인실이었지만 각 자리마다 커튼이 달려 있었고, 공간도 꽤 널찍했기 때문이다. 작은 텐트를 펼쳐놓은 것처럼 아늑했다. 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누워 평소처럼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낄낄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 되자 새벽부터 간호사 선생님들이 분주해졌다. 수술 순서를 몰랐기 때문에 혹시라도 일찍 수술을 받게 될까봐 나 또한 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오전 7시쯤에 주치의 선생님의 회진이 시작되었다. “잘해봅시다.”라는 짧은 말을 하고는 곧바로 떠나셨지만, 그 말에 담긴 자신감과 자부심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정맥 주사를 전담으로 놓아주는 간호사 선생님이 방문했다. 바늘이 두꺼우니 조금 아플 거라면서 신중하게 주사를 놓을 곳을 살펴주셨다. 위험회피 기질은 낮지만, 타인에 의해 뾰족한 바늘이 몸에 들어오는 것처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래서 병원은 정말인지 싫다.
‘잠깐이다. 아픔은 잠깐이야. 금방 끝난다. 어차피 이 시간은 지나가게 되어 있어’
나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최대한 반복했다. 혹여 내가 너무 무서워하거나 화들짝 놀라서 움직여버리면 선생님이 바늘을 헛찌르기라도 할까봐 정말 꿈쩍도 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선생님은 내 양팔을 이리저리 보더니 혈관이 가장 잘 보이는 손등에 주사를 놓았다. 퇴원하기 전까지 모든 약은 정맥주사를 통해서 투약되기 때문에 중요한 과정이었다.
“저도 정맥주사 맞을 때 악 소리 질렀는데 아주 잘 참으셨어요!” 칭찬과 격려를 해주시고는 선생님도 떠나셨다. 참을만했냐고? 아픈 건 아픈 것이었다. ‘아니에요. 선생님이 깔끔하게 놓아주신 덕분이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맥주사를 맞자마자 “와 진짜 아프네요.”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후에도 진료를 보러 갈 때마다 피검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거의 홍수법(flooding: 행동주의 노출치료 중의 한 가지로 공포증 치료에 주로 사용됨. 뱀 공포증 환자들앞에 뱀을 잔뜩 풀어둔다!)처럼 주사 바늘에 노출되었다. 덕분에 아주 조금은 체념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는 끊임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보통 하루에 여러 건의 수술이 이루어져서 정확하게 수술 시간을 예측하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다 하더라도 순서도 알려주지 않아서 나를 포함한 환자들은 수시로 간호사 스테이션에 들락거렸다. 나중에 같은 날 수술을 받았던 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수술이 나이 순서대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 연세가 많을수록 회복이 더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며 우리끼리 추측해 볼 뿐이었다. 내 건너편 할머니가 가장 먼저 수술을 받고는 병동으로 복귀할 때까지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정오가 넘어가자 슬슬 포기하고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곧 데리러 오실 거예요. 화장실 다녀오시고, 속옷 탈의하세요.”
신랑과 나는 올 것이 왔다면서 재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드디어 유명한 보라돌이 선생님(환자들의 이동을 담당하는 선생님. 해당 병원에서는 보라색 유니폼을 주로 입어서 보라돌이 선생님으로 불린다)이 나를 찾아오셨다. 나는 신랑과 보라돌이 선생님을 따라 수술실에 도착했다. 수술실 문 앞에서 신랑의 손을 잡았는데, 나보다 키가 훨씬 큰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면 곧바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시선을 그의 가슴에 둔 채 다녀오겠다며 대충 인사를 하고는 등을 돌려 수술실로 들어갔다. 혼자 마음을 졸이며 기다릴 신랑이 너무나도 눈에 밟혔지만, 한 번 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는 혼자 씩씩하게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만날 신랑을 위해서라도 나는 잘 견뎌내야 했다.
수술실에 있는 침대에 누워 또 한참을 기다렸다. 의료진은 여러 차례 내 이름과 수술 부위를 확인했고, 정맥주사로 이런저런 약물도 투여되었다. 내가 수술을 받았던 병원은 종교적 철학을 기본으로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수술실을 비롯해서 병원 곳곳에 성경 구절 같은 문장들이 적어져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신이 함께 하니 나는 강할 것이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리고는 수술 후기에서 읽은 것처럼 정말 목사님이 내 곁으로 다가오셨다. 종교가 있는지 물으시고는 혹시 나를 위해 기도해 줘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기도를 부탁드렸다. 철저하게 혼자라는 느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종교 활동은 하지 않아도 기도를 끝내며 함께 ‘아멘’이라고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목사님의 기도가 마무리되었을 때 목사님의‘아멘’에 맞춰 나도‘아멘’이라고 말했다. 목사님이 웃으셨고, 나도 웃었다.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들어갔다. 의료진의 무표정한 얼굴. 너무나도 일상적인 일이라 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일정하게 들리는 기계음을 들으면서 눈을 돌려 천장의 하얀 조명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음챙김이라는 심리치료 기법이기도 하고, 상담을 받을 적에 많이 연습했던, 내가 불안할 때 불안감을 다루는 방법이기도 하다. 고요해지길 바랄수록 요동치는 것이 마음이다. 그럴 땐 나에게 입력되는 감각 정보들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보고 듣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다. 아주 천천히 시선을 움직이면서 눈앞에 놓인 정보를 관찰한다. 풍경을 묘사하듯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거나 들리는 소리를 따라 해도 좋다.
천장이 회색이구나
조명이 하얗네
다들 파란색 헤어캡을 쓰고 있어
띠-띡. 띠-띡. 띠-띡. 띠-띡.
몸을 감싸고 있는 모포의 따뜻한 느낌도 느꼈다. 그리고는 마취가 시작되었다. 수면마취의 경험이 있다면 알겠지만, 눈을 감았다 뜨면 모든 것이 끝나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했다.
‘지혜야. 다 잘 될 거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