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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혜 Aug 15. 2023

갑상선암 수술, 그리고 그 이후

마취는 잠에 드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잠에 깊이 들더라도 내가 몸을 움직인다는 느낌,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어렴풋이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느낀다. 하다못해 렘수면 단계에는 꿈을 꾸기라도 한다. 하지만 마취 중에 나는 어떠한 것도 느끼지 못했고, 어떠한 기억도 없었다. 행동과 감정, 그리고 생각. 어떠한 것도 내가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쩌면 한 번 죽었다 깨어난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누군가는 마취를 하면 아주 푹 잤다가 일어난 기분이 들어 개운하다고도 하던데, 나에게는 확실히 불호였다.


마취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살았다는 강한 안도감이 들었고, 곧바로 강한 불쾌감이 밀려왔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리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머리가 뒤로 쏠리는 느낌에 누워있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도움을 요청해야 했지만 목소리를 크게 낼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에서는 퇴근이라며 즐겁게 웃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나 와주길 바라면서 계속 손짓을 했지만 그 누구도 나를 봐주지 않았다. 낙상 방지를 위해서 올려놓은 침대 난간을 쾅쾅 내리쳤다. 그러자 의료진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환자분. 어디가 불편하세요?”


나는 침대를 올려달라고 손짓했다. 의료진은 내 침대를 아주 조금 올려주었다. 여전히 모든 것들이 불편했지만, 상체가 조금 올라오자 두통은 훨씬 덜 했다. 그리고는 얼마가 흘렀을까. 보라돌이 선생님이 다시 오셨고, 내 침대를 수술실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수술실에 나가자 신랑이 보였다. 신랑은 고생했다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신랑에게 말을 했다.


“너무 힘들어.”




신랑은 내가 수술실에 들어가고 병실로 돌아왔지만, 도무지 편하게 있을 수 없어서 다시 수술실 문 앞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했다. 수술이 끝난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확인했다고 한다. 수술 시간은 40분 정도였지만, 수술 전과 수술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니 2시간 넘게 혼자 기다린 것이다. 수술 경과를 보호자의 카카오톡으로 알려주었다. 신랑은 그때마다 가족들에게 전달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제발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수술 후에 신랑을 봤을 때, 그 사이 더 듬직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병실로 돌아오고 나서 신랑과 교대하기 위해 엄마가 도착했다. 신랑은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걱정하지 말고 잘 내려가라고 했다. 고생했으니 집에 가면 제일 좋아하는 치킨도 꼭 먹으라고 했다. 수술이 끝난 직후 2시간 동안 심호흡을 잘 해야 한다고했다. 마취가스가 폐에 가득 차 있느니 최대한 호흡을 길게 해서 마취가스를 내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전문가의 말을 아주 잘 듣는다. 정해진 매뉴얼을 아주 잘 따른다. 그래서 병실에 돌아오자마자 호흡을 시작했다. 크게 들이쉬고 크게 내쉬었다. 몸은 힘들고 약 기운도 남아있어서 몇 번이나 잠에 들 뻔했지만, 그때마다 옆에서 엄마가 나를 깨우고, 숨을 쉬라고 해주었다.


목에 배액관을 달고 있어서 움직이는 것이 불편했다. 화장실에 가서 옷을 벗고 올리는 것도 힘들어서 엄마가 도와줘야 했다. 내가 춥지는 않은지, 일어나고 싶지는 않은지, 화장실에 가고 싶지는 않은지 엄마는 옆에서 계속 물어봐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잠을 푹 못자는 엄마가 보호자 간이 침대에서 자는 것이 신경쓰였다. 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는 소리에 일어나는 엄마에게 미안하면서도 곁에 엄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안심이 되었다. 진통제를 계속 놔주어서 통증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프고 힘들었다. 그날은 그랬다. 영원히 이 고통이 계속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내일이면 정말 좋아질까? 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계속 이대로 몸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계속될 정도로 고된 하루였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 거짓말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도 가벼웠다. 어김없이 7시에 회진이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내 상태를 보고는 수술도 잘 됐다고 하셨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엄마와 운동을 나가기도 했다. 수술 당시에 피가 많이 나서 지혈하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이후에도 배액관으로 피가 계속 나오긴 했지만, 수술하고 3일째 되는 날 퇴원할 수 있었다. 퇴원하는 날에 배액관을 빼니 움직임도 더 수월해졌다. 그리고는 다시 집에 돌아왔다. 돌아와서 나는 자고 또 잤다.




수술 이후 정확히 10일을 쉰 다음 직장에 복귀했다. 첫날에는 일을 모두 마쳤을 때, 몸에서 열이 나고, 목 조임이 심했다. 나도 모르게 서글퍼져서 퇴근길에 차에서 잠깐 울었다. 하지만 내 몸은 생각보다 회복력과 적응력이 좋았다. 다음 날부터는 일을 해도 첫날처럼은 힘들지 않았다.


2주가 흐르고 첫 외래 진료를 봤을 때, 호르몬 수치도 정상이고 상처도 잘 아물고 있다고 했다. 한쪽만 남은 갑상선이 열심히 일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노래방에 가서 신랑과 있는 힘껏 신나게 내지를 수는 없지만, 목소리도 예전처럼 잘 나왔다. 모든 것이 감사했다. 몸의 한 일부를 떼어냈음에도 제 기능을 하려고 애쓰는 내 몸에게 고마웠다. 이제 재발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은 내 몫인 것이다.


수술을 하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수술을 담당해 줄 의료진을 전적으로 믿는 것과 내 몸이 잘 회복할 수 있도록 건강을 챙기는 일뿐이었다. 수술 후에 많은 약을 복용할 것임으로 나는 최대한 간이 무리하지 않도록 약이나 즙 종류, 탄산음료를 끊었고, 좋아했던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분명 나는 잘 견뎌낼 것이라며 스스로를 믿어야 했다. 매 순간 나는 덤덤했지만, 수술 날짜를 기다리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기분 상태로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보내야 하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어차피 수술 이후 중단해야 했으므로 섣불리 시작하지도 못했다. 무기력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수술 후에 하고 싶은 일을 리스트에 적었다. 적어 놓고 보니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들이 바글바글했다. 이 작업은 치료와 회복에 대한 동기를 이끌었다. 오히려 약간의 설렘을 느끼며 빨리 수술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회복 이후의 삶을 그려보는 것은 확실히 도움이 된다. 나는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웃으면서 신랑에게 말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나는 다시 태어나는 거야.”




수술을 한지 한 달 남짓 흐른 지금, 거창하게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사실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다. 하지만 그 말에는 조금 유난스럽더라도 건강한 음식을 먹고 내 몸을 섬세하게 돌볼 것이라는 다짐을 담았고, 이전엔 용기가 없어서 또는 단순히 귀찮아서 하지 못했던 일들에 용감하게 도전하고 조금 더 주체적으로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담았으며, 무엇보다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는 삶의 의지를 담은 말이었다.


암에 걸렸다고 해도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수 없다. 시간은 흐르고 인생도 흘러간다. 나의 삶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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