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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Nov 15. 2024

2등할 결심

헤비의 프레이밍 4

이제 기아의 우승 앰블럼은 12개로 늘어났다

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번 2024년 한국시리즈 1차전 현장에 있었다. 야구장이 열리기 한 시간 전 쯤에 도착했는데, 그땐 이미 입구마다 입장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의 표정에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수시로 교차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하늘엔 구름 사이로 군데군데 푸른빛이 보였다. 비가 온다는 소식은 있었지만, 예보 기사를 보면 흩뿌리다 그치기를 오락가락하다가 경기가 마무리 될 때에야 쏟아질 거라고 적혀 있었다.


나와 친구는 외야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입구에서 사 들고 간 순살 치킨 한 마리는 순식간에 사라졌고(맛있었다), 친구는 외야 입구를 통해 주변 편의점에 가서 요깃거리(치킨은 에피타이저였다)가 될만한 햄버거와 함께 추가 안주 및 추가 맥주를 조달해왔다. 그걸 다 비울 때까지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미리 사족을 붙이자면 기아 팬이 워낙 늘어났고, 티켓 구하기가 힘들어지다보니 외야 증축 이야기가 가끔 보이는데 솔직히 잔디밭에 돗자리 깔고 신발 벗고서 다리 쫙 편 채로 맥주 한 잔 해보면 그런 말이 쉽게 안나오지 싶다. 그 여유를 아무래도 잃고 싶지가 않다.


여하튼 살짝 발그레해진 나는 경기를 기다리며 간간히 틀어주는 노래에 맞춰 몸을 되도록 티나지 않게 슬며시 들썩거리고 있었다. 늦게 들어온 분이 돗자리를 펼 수 있게 자리를 조금 내주기도 하고, 한국시리즈 응원도구로 나눠주는 타월과 담요 받는 자리도 알려주는 등 나름 심심할 틈은 없었다. 그러고 있느라 언제부터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해가 이제 본격적으로 기운다 싶을 무렵이었으니 경기 시작하기 3~40분 전이 아니었을까 한다. 출발하기 전 미리 사 둔 일회용 비닐우의를 꺼내입고(옆자리 아가씨가 노란 타이거즈 굿즈 우의를 꺼내입는데 약간 부러웠다) 경기가 어찌 될려나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경기 진행요원들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게. 대형방수포를 서너번은 깔았다가 접었다가를 반복했고, 식전행사에 맞춰 광고판이 들어왔다가 빠지기도 반복했다. 비는 생각보다 굵게 내렸고, 예보는 실시간으로 변했고, 기상레이더엔 몇시간 동안 구름이 뒤덮여 있었다. 솔직히 취소를 시킬 분위기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장 나부터 취소가 되면 일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있었다.

대형 태극기는 대형 국뽕을 부른다

한 시간 정도 미뤄진 경기는 억지로 시작이 되었다. 안그래도 불안한 기아 타이거즈의 수비는 비와 함께 더 난장판블루스를 춰댔지만, 제임스 네일은 비를 맞은 탓인지 열을 내지 않고 차분히 투구를 이어갔다. 5회 말이 끝나고 비는 더 굵어졌고, 관중석의 사람들은 그냥 1차전 비긴 걸로 하고 끝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이구동성으로 해댔다. 하지만 경기는 이어졌고, 김헌곤의 홈런이 나왔고, 장현식은 주자를 더 내보냈고, 다시 방수포가 깔렸다.



사실 미리 얘기를 하자면 난 포스트시즌 우천시 서스펜디드 룰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연히 강우콜드로 기아가 졌다고 생각했다. 같이 갔던 친구도 마찬가지여서 둘은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면서 5회 말 끝나고 비기고 있는 상황에서 중단했어야 한다고, 이게 뭐냐고 언성을 높여댔다. 그러다가 사실 둘 사이 언성도 조금 높아졌다. 난 더 비 맞지 말고 빨리 나가서 택시를 잡은 다음 숙소 가서 쉬자고 했고, 친구는 그래도 좀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결국 우린 비를 맞으며 젖어들어가는 그라운드를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분노의 5단계.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왔음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다섯 가지 심리상태를 지나간다고 하는 이론이 있다. 이게 꼭 죽음 뿐 아니라 여러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난 생각한다. 일단 주어진 상황을 부정하려고 들고, 왜 이런 상황이 주어졌는지 화가 나다가, 무언가 이 상황에서 그나마 괜찮은 부분을 억지로 찾아내려고 하고, 그러다가 왠지 많이 서글퍼지고, 마지막엔 어쩔수 있나 싶어지며 다 받아들이게 된다.

경기 시작 전 촉촉한 비 위로 울려퍼지던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

1차전을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한국시리즈가 예상보다(예상은 4승 무패, 혹은 4승 1패였다)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고, 만약 2차전을 내주면 시리즈 자체가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원태인의 투구는 진짜 대단했다. 상대가 대단한 투구를 보여주는데 무섭고 짜증이 나기보다는 뭐랄까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달까? 시리즈 전체가 원태인의 하드캐리로 넘어가게 된다고 하면 난 기꺼이 박수를 쳐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아 타이거즈의 팬으로서 여러 팀 기록이 있겠지만,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기록은 역시나 '한국시리즈 11회 진출, 11회 우승'의 무패기록이다. '완벽함'이란 도무지 싫어할 수가 없는 가치다. 타이거즈는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말그대로 완벽한 팀이다. 어떤 시즌에 성적이 좋지 못해도, 타이거즈 팬들은 "우승을 못할 바에는 한국시리즈에 가지 않는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 뒷짐을 지고 물러날 수 있다.


비 내리는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정말 여러 생각이 어지러이 떠올랐다. 맞은편에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라는 팀은 준우승을 10번(이번 2024년으로 11회째가 되었다)한 팀이었다. 물론 준우승만 한 팀은 아니다. 우승도 8번이나 했고, 무엇보다 패넌트레이스에서 유일하게 꼴지를 해보지 않은 팀이기도 하다. 한동안은 우승이 없는 팀이라는 억울한 평가절하를 당했다. 분명 1985년도 통합우승 기록이 있는데, 정작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는 바람에 어이없게도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은 없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저 대단한 팀이 10번의 준우승을 했는데 그 모든 걸 씁쓸한 실패로 봐야 할까, 아니면 괜찮은 경험으로 봐야 할까? 이렇게 생각이 제멋대로 펼쳐지다보니 문득 이런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난 한 번도 상대 팀이 트로피를 들어올렸을 때 멋있는 승부였다고 마음껏 박수를 쳐 준 적은 없네.'


'어쩌면 이번이 2등을 해볼 첫 번째 기회일지도 몰라.'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확실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2024년 삼성 라이온즈는 정말 멋진 팀이었다. 애초에 전문가들은 전력이 강하지 않다고 하위권으로 진단을 내렸다. 초반 스타트도 생각보단 좋지 않았다. 그러다 이재현-김영웅이라는 신진급 내야수들이 전면에 배치되고 꾸준히 주전으로 기용되기 시작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다. 여기에 내야수였던 김지찬이 중견수로 가면서 야수진의 교통정리가 잘 이뤄졌다. 팀의 중심인 구자욱은 MVP급 활약을 했고, 이제 노장으로 분류되는 강민호와 박병호도 나이를 잊은 활약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욕받이에 가까웠던 김헌곤 이성규등이 그간 흘렸던 땀의 보상을 거두기 시작했다. 코너-원태인-레예스로 이뤄지는 선발진은 10개구단 중 최상급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2024시즌 가장 강한 팀은 타이거즈였을지라도 가장 아름다운 팀은 라이온즈였다

무엇보다 올 시즌 삼성 라이온즈는 야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수비에 가장 충실한 팀이었다. 시원하게 날아가는 홈런타구나 구석구석 꽂히는 투수의 속구도 좋지만 야구에 있어 가슴 깊은 곳에서 자연스레 터지는 감탄사를 이끌어내는 건 역시나 수비장면이다. '기가 막힌'이란 수식어는 그럴 때나 쓸 수 있다. 빠르게 빠져나가는 타구를 쉽게 걷어올려 물흐르듯 아웃카운트로 연결시키던 현역시절 박진만의 수비를 연상시키는 삼성 선수들의 수비는 약체로 평가받던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끌어올린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그렇다. 이런 팀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않나 싶어졌다. 이들에게 진다면 "당신들 멋있습니다. 잘했습니다. 내년에 한 번 더 해봅시다." 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판초우의를 입으면 비는 피할 수 있어도 어차피 다 젖는다는 걸 안다. 통풍이 안되서 안에서 땀이 차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날은 날이 적당히 썰렁해서 셔츠 위에 유니폼을 입고 그 위에 다시 비닐 우의를 입었음에도 안이 하나도 젖질 않았다. '우의는 이런 날씨에 이렇게 써야하는 거구나, 정도만 알았어도 남는 하루'라는 생각을 하며 나와 친구는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일단 챔피언스필드 근처를 빠져나온 다음 택시를 탈 생각이었다.


거기서 버스 안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되면 기아가 유리해졌다는 말이었다. 마침 친구가 다른 기아팬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더니 내게 말했다.


"서스펜디드라는데?"


사태파악이 끝난 후 난 꽤나 입맛이 씁쓸해졌다. 정말 어렵사리 '2등할 결심'을 했는데, 이게 뭔가 싶어졌다.


이후 일들은 모두가 알고 예상한 결과를 향해서 흘러갔다. 이틀 후 서스펜디드 경기는 속개되었고, 기아 불펜에서 가장 강력한 카드인 전상현이 나와서 삼성의 무사 1, 2루 찬스를 지워버렸다. 무엇보다 그 이틀 동안 기아 타자들은 평정심을 되찾은 듯 보였고 부담감은 고스란히 삼성의 불펜진이 떠안게 되었다. 임창민의 폭투는 그 과정에서 나온 필연적인 사고였고, 그렇게 그날 기아 타이거즈는 2승을 거둬가게 되었다.


기아타이거즈가 우승한 것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건, 삼성 라이온즈와 기아 타이거즈를 비롯한 전체 야구 팬들이 이 일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무엇을 비판해야 하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위로를 건네야 하고, 누구에게 축하를 해야 하는지 이들은 정확한 행동을 보여줬다. 물론 팬은 다수이기에 엇나가거나 비뚤어진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인데, 다수 팬들은 이런 사람들을 빠르게 비난과 조소의 틀에 가둬버림으로서 모두의 축제가 오염되지 않는 성숙함을 보여줬다.




국룰에 따르면 이 사진을 두 개 올려야 하는데. 국룰에 따르면 이 사진을 두 개 올려야 하는데.

난 스타크래프트 세대라서 '2'라는 숫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2'의 화신처럼 느껴지는 프로게이머 홍진호 선수가 떠오른다. 그는 프로게이머 시절 한 번도 우승을 거두지 못했다. 그가 우승한 대회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정규가 아닌 이벤트성 대회였기에 그의 2등 이미지는 도리어 강화되고 만다.


승부의 세계에서 2등이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무의미한 것이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 하지만 내가 야구를 사랑하는 건 야구가 실패와 의외의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야구가 실패와 의외로 만들어지는 스포츠라면, 1등과 2등은 어쩌면 운이 좋고 나빴다 정도로 갈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누가 누굴 꺾고, 누가 누구를 밟고, 누가 누군가를 올라타 짓누른 게 아니라 그저 웃으면서 '한 판 더'를 외칠 수 있는 그런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다. 2024 시즌이 끝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지금 우리는 이미 2025 시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야구는 그렇게 계속 다음으로 이어진다.


홍진호 씨는 자신의 은퇴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한다곤 하지만, 2등도 많이 하면 사람들이 기억해주더라고요."


이 글 맨 앞에 걸어놓은 건 타이거즈 프랜차이즈의 우승 앰블럼 퍼포먼스 사진이다. 저 우승 앰블럼들을 유심히 보다보니 내겐 낯선 그림들이 꽤 섞여있었다. 나름 타이거즈 광팬을 자처하는데도 '저 해 우승 앰블럼 모양이 저랬었나?' 싶어졌더랬다. 사실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1등 조차도 잊어버린다. 그러니 다들 더더욱 2등을 기억하겠나 하는 거다. 하지만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세상이 진짜로 기억하는 건 1등도 2등도 아닌 '이야기'다. '어떤 결과를 맞았는가'보다 사실 더 중요한 건 '그 길 위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는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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