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어.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아름다운 표현이 호기심이지 어찌보면 욕심과 질투심이었지 싶어.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봐야 하고, 안해본 건 먼저해봐야 하고 말이지.
중학교 다니면서 얌전히 공부만 하다가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진로를 갑자기 체대로 바꿨어. 초등 때부터 운동신경이 남달랐던 것도 있었는데, 순전히 그냥 멋있어보여서 였던 것 같아. 그때 당시만 해도 검도로 시골에서 검도로 대학가는 친구들이 드물었지. 장비도 멋졌고 구호도 참 멋있는 운동이었어. 그런데 몇 년을 해도 나비처럼 날아올라 벌처럼 쏘아야 하는 순발력이 길러지지 않는 거야. 유연성과 근력은 자신있었는데, 순발력이 떨어졌던 것 같아. 아깝긴 했지만 이대로 대학을 진학한다면 빛도 보지 못한 채 겨우 졸업이나 하지 싶었어. 그나마 학교 다니면서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었던 과목이 있어서 빠르게 진로변경을 할 수는 있었어. ' 역사학.'
지금 생각해도 진로를 참 쉽게도 변경했어. 체대 진학으로 새벽이든 주말이든 나가서 연습만 하던 아이가 갑자기 공부하겠다고 책상에 앉았으니 부모님도 많이 당황하셨을 거야. 어려운 살림에도 아끼지 않으시고 지원해주셨는데, 갑작스럽게 인문대를 가겠다고 하니, 기가 막히지.
실망시켜드리면 안되겠다 싶어서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 다행히 역사학과로 진학은 했는데 운동한답시고 잠시 놓친 몇 년간의 공부가 그렇게도 안타까웠던 거야. 그래서 대학진학 첫 날부터 기를 쓰고 공부했어.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된 때였지. 공부만이 환경을 바꿔줄 수 있을 거라 믿었지.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야겠는데, 왜 그토록 내가 공부에 집착하는지, 배경설명 쯤 될 것 같아.
집안에 말이지. 대학을 나온 사람이 없어. 가까운 친척들 사이에 말이야. 다들 상고를 나와서 바로 돈벌이 취직을 했지. 내가 태어나고 두 살 때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훈장님을 하셨을 정도로 학식이 높으신 분이었다고 해. 그런데 자손들이 공부를 안 해. 아버지는 머리가 좋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마을의 수재였는데도 생활력 강한 할머니 성화에 못이겨 일찌감치 취직을 하셨다고 해. 아버지에게도 배움의 한 같은 게 있으셨던 거겠지. 친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딸 셋 모두 대학에 진학시키셨어.
대학에 와 보니 공부가 더 재미있는거야. 억지로 해야하는 게 아니고 내가 찾아서 하는 공부라는 게 말이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어. 하루에 10시간 이상은 했지, 외국어공부며 독서, 자격증공부.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어 시간을 쪼개가며 열심히 했지. 남편하고도 이런 이야기 가끔하는데 공부의 재미를 초등때 알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고 말야.
남편의 이야기를 잠깐하자면, 남편도 배움의 한?이 조금 있는 사람이야. 내가 보기엔 원래 머리가 좋았던 사람인 것 같은데 공부량이 적지 않았을까 싶어.
첩첩산중 같은 시골에 살던 남편은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 시내로 나와서 누나와 자취를 했어. 그런데 주말만 되면 시골로 들어가야했다는 거야. 그 이유는 소키우고 농삿일 일손도우러 말이지. 중간, 기말 시험이 있는 그 주만 겨우 시내에 남아 공부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매주말마다 시골에 들어갔대. 웃으면서 들었지만 참 가슴아픈 이야기야. 그러면서 남편이 그러는 거야. 내가 그 시간에 공붕를 했다면 난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말이지. 그래서 공부에 미련이 남는다고 해.
아차.
자꾸 다른 이야기로 새면 끝이 없을 것 같아.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면. 대학때부터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내가 왜 큰인물이 못되었냐면 말이지.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해. 좋게 이야기하면 호기심, 달리보면 욕심과 질투. 그 욕심이 결국엔 집중력을 분산 시켰던 것 같아. 발화가 될 때까지 돋보기의 햇빛을 한 곳에 집중시켰어야 하는데, 여기저기 자꾸 비춘거지. 발화가 되기는 커녕 까맣게 그을린 자국만 여러 남았다. 아려. 그 자국들이.
두 동생들은 20대 초반 부터 한결같이 하나의 직업으로 둘째는 18년 막내는 15년 째. 한 곳에만 에너지를 쏟았어. 그랬더니 지금은 그들이 하는 일은 힘을 들이지 않고 노는 듯 하지.
그에 반해, 나는 말이지. 지금까지 정식 직업은 네 가지, 비공개 직업은 세 가지 정도가 더 있어. 공부를 오래하느라 직장생활은 딸 셋 중 가장 짧은데 경험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지.
만능인인 그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어.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야. 여러 경험을 하고 공부를 했다는 게.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후회가 되는 걸까. 지금은 말이지 이런 느낌이야.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다는 게 누군가의 눈에는 한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춰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저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어. 그래서 요즘 고민이 깊은 것 같아. 그동안 나를 잘 모른은 상태에서 이것저것만 공부해 온 것들이 후회되기도 하고 암튼 그래.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시켰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