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과 덕산
남편을 떠나보내고 맞는 두 번째의 새해, 2025년 1월 1일.
수험생, 졸업생, 입학생, 돌쟁이 등 다양한 연령대로 바쁘게 성장하는 여섯 손주들을 보살피고 뒷바라지하느라 우리 집 세 아이들은 정신이 없다. 모두의 상황에 맞는 날을 골라 아들집에 모여 주문 배달 음식으로 다 같이 식사하고 얼굴 보는 것으로 연말연시 가족 모임을 가졌다. 지금은 남편의 빈자리를 제대로 메꾸기에 역부족인 과도기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시간을 흘려보내자고 마음먹는다. 머잖아 천천히, 내가 가족 모임의 주체가 되어 정례적인 행사를 치르는 때가 올 것이다.
한 해의 연말연시를 맞는 의미는 나름 각별하고 소중하다. 혼자 지내는 동창 E와 함께하기로 뜻을 모았다. 1박 2일 예산과 덕산 나들이를 계획했다. 2024년 12월 31일에는 E와 내가 같이 속해 있는 일곱 명 동창 모임의 점심 약속이 있었다. 가벼운 여행 배낭 차림으로 만나 모임을 끝내고 E의 집으로 갔다. 벌써 어둑해진 시간, 뚝딱뚝딱 재빠르게 음식을 차려내는 능숙하고 세련된 E의 요리 솜씨로 집밥 저녁 식사를 마쳤다.
뒹굴뒹굴 넷플릭스 영화 두 편을 감상했다. 이중의 얼굴을 가진 남자의 교묘한 가스라이팅에서 해방되는 한 여자 이야기 'Girl on the train', 알프스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두 친구의 우정과 재회를 그린 'The Eight Mountains'. 눈으로는 화면을 쫓으며 편안한 자세로 눕거나 앉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고 맞장구치는 시간, 우리들의 힐링타임이다. 다행히 좋은 영화를 골랐다. 묵직한 주제도 좋았다.
이튿날인 2025년 1월 1일, 예매해 둔 열차표로 11시 6분, 수원발 익산행 장항선 무궁화호를 탔다. ktx, srt, 청춘열차, 이음열차, 골드라인, 공항열차 등 많이 생겨난 새로운 이름 사이에 추억처럼 남아 있는 무궁화호란 이름이 정겹다.
12시 25분, 예산역에 도착했다. 검색해 놓은 맛집 '50년 전통 할머니 장터국밥'을 찾아 나섰다. 핸드폰앱을 참조하지만 추운 겨울 텅 빈 시골 읍내길에서 간혹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길을 확인해 가며 뚜벅이로 40여 분을 걸었다. 멀리 보이는 빈 들판과 낮은 산들, 짬짬이 휘익 곁을 스치며 겨울 맛을 실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쨍하니 밝지만 엷은 햇볕, 오래된 읍내의 낡은 가게들. 이들이 건네주는 아늑한 시골길의 겨울 정취가 평화롭고 안온하다. 가르쳐 주는 사람마다 '아마 줄을 길게 서야 할 것'이라는 토를 달았다. 1시가 넘은 시간인데 뭘 그럴까? 반신반의하며 도착해 보니 멀리서도 긴 줄이 보인다. 야금야금 느리게 줄어드는 줄을 따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겨울 햇볕 아래 꽤 긴 시간 지나가는 사람들과 낯선 풍경들을 구경하였다.
차례가 되어 들어선 식당 안은 활기차고 깨끗하고 친절했다. 가성비 좋은 점심식사메뉴였다. 기분 좋게 맛있는 국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바로 가까이 '백종원 거리'가 있다. 국민요리사 백종원이 고향인 예산에 쏟아 부은 재능기부로 탄생된 사랑의 먹거리 골목이다. 신년연휴인 때문일까?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새콤달콤 주로 젊은이들을 겨냥한 참신한 아이디어 상품들이 자그맣고 예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미 하루치 물량이 다 팔렸다며 손을 터는 가게들도 있었다.
가볍게 군것질거리를 맛보고 택시관광을 불렀다. 관광 수입을 늘리기 위해 거의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도입, 운영하는 택시관광. 12만 원으로 6시간 동안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데려다주고 기다려 준다. 요금의 절반인 6만 원은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는 안전하고 편리한 제도다. 이곳 지방 거주자인 택시 운전사는 유명 관광지와 맛집 정보에 환하다. 꼭 가 보고 싶은 곳을 먼저 물어보고 노선에 맞게 행선지를 알차게 계획해 준다. 덧붙여 숙소 도착까지 6시간을 야무지게 잘 쓸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가 보고 싶은 곳은 김정희고택과 예당저수지였다. 먼저 들른 김정희고택 옆 기념관에는 추사 김정희의 일생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고조할아버지인 김흥경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은 영조가 사랑하는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해 월성위라는 벼슬을 얻었다. 할아버지 또한 우참찬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아버지 김노경은 판서를 지냈다. 막연하게 귀양을 많이 간 뛰어난 문필가 선비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조선봉건사회 최상의 양반 계급 가문 출신이었다. 타고난 출중한 재주와 각고의 노력으로 중국에서도 최고로 여겨 주는 문필가, 서예가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어서 기사님이 안내해 주는 대로 예당호 출렁다리를 건너고 엄청난 규모의 사재를 투자했다는 예당 관광농원을 둘러보았다. 으리으리한 2층짜리 대규모 빵카페에서 기사님께도 따끈한 라테 커피 한 잔을 대접해 드렸다. 추천해 준 민물나라어죽식당에서 건강한 저녁을 해결하고 숙소까지 편안하게 왔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온천단지 1로 67.
A2 호텔 디자이너스.
이름도 생소하다. E가 예약해 놓은 무인 호텔이지만 다행히 프런트에 안내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안내인이 없어도 E는 핸드폰 앱으로 척척 해결을 잘 해낸다.
이튿날 아침에는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Splas Resom 온천사우나를 즐기고 버스로 수덕사를 향했다. E가 신경 써서 준비한 여행코스다.
숙소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서 11시 45분 발 558 버스를 11시 54분에 탑승하여 12시 10분 수덕사 종점에서 내렸다. 어제 택시 기사분이 알려 준 중앙식당을 찾아 산채더덕구이정식으로 푸짐한 점심을 먹고 덕숭산 수덕사를 둘러보았다. 여승들의 참선 암자로 이름 높은 수덕사. 입구에 있는 수덕여관은 수덕사 여승이 된 일엽스님을 찾아온 나혜석이 장기투숙하여 머무르며 찾아온 제자들에게 그림을 가르쳤고 나중에는 제자 중 한 명인 이응노 화백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수덕여관 아래에 있는 수덕사 선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응노 화백의 그림들도 감상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2년 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83년 프랑스에 귀화하고 1985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응로 화백. 어려운 시대의 어려운 시간을 살아온 힘든 삶의 흔적이 여기에도 남아 있었다.
수덕사에서 내려와 3시 20분 예산행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온 예산역. 4시 59분발 장항선 무궁화호를 탔다. 두 시간 후면 용산역에 도착한다. 이틀을 비웠던 내 집이 있는 곳, 서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