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0’은 이제 1, 2, 3으로 자라났니?

빈 칠판에 0을 그리던 아이

by 다시 사랑

2학년 교실, 내 인생에 ‘별’을 달고 온 아이가 있었다. 0혁이. ADHD라는 진단명과 함께 따라붙는 ‘말썽꾸러기’라는 꼬리표는 0혁이의 작은 어깨를 늘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0혁이는 그저 눈이 반짝반짝 귀엽고, 머리가 조금 큰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이 넘쳐나서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 창의적인 예술가였다.


한 번은 수업 준비를 하러 교탁 앞에 섰다가 헛웃음이 터졌다. 내 소중한 교사 도장이 교탁 위에 빈틈없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인은 뻔했다.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구석에 서 있던 0혁이.


“0혁아, 네가 찍었으니까 네가 지우자.”


분무기와 걸레를 건네자 0혁이는 낑낑대며 책상을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자 아이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선생님, 안 지워져요….”


그 울먹임이 어찌나 순수하고 투명한지, 나는 웃음을 참으며 버물리를 가져와 쓱쓱 문질러 주었다. 마법처럼 지워지는 도장 자국을 보며 0혁이는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은 내 마음속에도 버물리처럼 번져, 아이가 만든 소동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 버렸다.


어느 날은 사물함에 있던 준비물을 몰래 집에 가져갔다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돌아오기도 했다. 나에게 혼이 날까 봐 무서워 혼자 사물함 짐을 빼고는 “학교에 다시는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이 아이에게 ‘사고뭉치’가 아닌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얘들아, 이 안전 애니메이션 캐릭터 좀 봐. 우리 0혁이랑 진짜 닮지 않았니?”


아이들이 띠용, 하고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진짜요! 하는 짓도 똑같아요!” 그날 이후 0혁이는 사고뭉치에서 교실의 ‘인기 캐릭터’가 되었다. 아이들은 0혁이의 엉뚱함을 비난하는 대신 즐거워했고, 0혁이는 마치 연예인이 된 듯 밝아졌다. 꼬리표가 아닌 ‘캐릭터’를 입혀주자, 아이 안의 그늘이 걷히고 반짝이는 보석이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나의 보석꽃 정원에서 행복했던 1년이 지나고, 0혁이는 3학년이 되었다. 그해 0혁이가 만난 정원사는 조금 엄격하고,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언젠가부터 쉬는 시간마다 0혁이가 우리 반 뒷문을 조용히 열고 찾아왔다. 그리곤 내 책상 위에 손가락으로 커다랗게 ‘0’을 그렸다.


“선생님, 저 친구가 0이에요.”


그 아이가 그린 0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껴진다는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마음이 텅 비어버렸다는 구조 신호였을까. 나를 찾아와 그린 그 커다란 원 안에는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시린 겨울이 가득 차 있었다. 결국 0혁이의 3학년 선생님은 아동학대라는 아픈 상처를 남기고 학교를 떠나셨다.


가끔 문득 0혁이가 생각난다. 도장을 찍으며 장난치던 그 해맑은 손가락으로 외로운 ‘0’을 그리던 그 뒷모습이.


0혁아, 선생님은 가끔 하늘에 대고 물어본단다.

너의 그 ‘0’은 이제 1, 2, 3…으로 따뜻하게 자라났니?


누군가 너를 ‘무(無)’라고 정의하려 해도, 너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1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생님 교탁에 가득 찍어두었던 그 장난스러운 도장 자국들처럼, 너의 삶도 너만의 예쁜 흔적들을 남기며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기를. 네 안의 보석꽃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는 걸, 선생님은 멀리서도 믿고 있단다.





"글로 다 전하지 못한 고요한 위로를 영상과 소리로 담고 있습니다.

지친 하루의 끝,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쉬어가고 싶다면 유튜브 '다시 사랑'에서 함께 호흡해 보아요."

https://www.youtube.com/@dasi_s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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