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덕분에 마음껏 놀았다
나는 78년생이다. 정확히는 빠른 78이다. 서울 봉천동의 골목에서 초등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봉천동은 시골에서 성공을 꿈꾸며 상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소위 ‘달동네’로 불리던 이곳은 판자촌, 언덕 위 단칸방 마을이 이어졌고,
강남과 가까워서 빈부의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빠는 전라남도 보성, 바닷가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우리 집은 판자촌은 아니었지만,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동네의 2층 주인집 계단 아래 작은 단칸방이었다. 네 남매와 엄마, 아빠까지 여섯 식구가 작은 문 하나를 들고났고, 주인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이유 없이 눈치를 보며 인사하곤 했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 시절에는 사교육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내내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다. 나에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는 ‘학원을 다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였다. 같은 반 '소리'라는 친구는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부자였다. 소리네 2층 집 문을 열면, 우리 방보다 더 넓은 거실이 나왔다. 윤기 나는 나무 마루에 놓인 하얀색 슬리퍼는 마시멜로처럼 폭신해 보였다. 거실 안쪽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소리는 피아노 뚜껑을 천천히 열고, 빨간색 덮개를 접어 위에 올려놓았다. 무거운 의자를 끌어 치마를 야무지게 쓸어내리고, 두 손을 피아노에 올리는 과정은 공주 같았다. 어느 날, 피아노 학원의 콩쿨에 초대받아 두 살 아래 여동생과 함께 갔다.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친구의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콩쿨이 끝나고, 드레스를 입은 소리는 무대 중앙에서 인사를 했다. 반으로 묶은 리본이 보였고, 찰랑이는 긴 머리가 어깨로 흘러내렸다. 꽃다발을 든 친구 옆에 나와 동생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친구가 부러웠지만, 나에게는 바랄 수 없는 꿈이었다. 그저, 내 손으로도 연주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생겼다. 5학년쯤, 학교에서 멜로디언을 배웠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의 자리를 배우고, 허락된 방 한 칸 같은 작은 건반에 손을 올렸다. 숨이 찰 때까지 불며 ‘반짝반짝 작은 별’을 끝까지 연주했다.
혼자서도 참 열심히 배웠다. 미술도, 수학도 그랬다. ‘하고 싶다. 재밌다.’ 내 안에서 열망이 피어났다. 교육적인 돌봄을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대신 나에게는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 멍하니 있는 시간도 많았고, TV도 많이 봤지만, TV 바보가 되지는 않았다. 미술 숙제는 최고의 놀이였고, 공식을 몰라도 수학 문제를 나만의 방식으로 풀었다. 나는 끊임없는 자발적 호기심을 따라 움직였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싸구려 조립 로봇을 하루 종일 설명서를 보며 조립했고, ‘슬램덩크’ 만화책이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한 권씩 사서 네 남매가 닳도록 돌려 읽었다.
엄마의 알코올 의존증, 아빠의 잦은 외박으로 싸움이 끊이지 않던 밤이 지나고 나면 나는 동네에 나가 고무줄놀이를 하고, 구슬치기를 하며 웃을 수 있었다. 가난하고 불행한 현실에도, 내 안의 끊임없는 호기심은 무언가에 몰입하게 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피아노, 미술, 수영 학원을 다니며 배움을 놀이처럼 즐겼다.
유아교육을 전공한 나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보며 그 안에 숨은 잠재력의 씨앗들을 발견했다. 아직 피어나지 않았지만, 분명 거대한 씨앗들이 숨어 있었다. 그 아이들의 모습은 어릴 적의 나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나도 저런 아이였겠구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이었겠구나.’
나는 내 안의 숨은 잠재력들을 스스로 싹틔우기로 했다. 나를 돌보고, 나를 배웠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어릴 적 방치되었던 덕분에 나는 호기심을 실험할 시간이 있었고, 한없이 공상할 수 있었다. 자발적인 내적 동기에서 시작된 놀이들은 나의 강점이 발현되는 시간이었고, 실패해도 괜찮았고, 시도할 때의 제한도 없었다.
수학 문제를 공식을 따라 풀 필요도 없었고, 로봇 조립이 남자아이들만의 것이라는 편견도 없었다. 자유로운 환경은 내 생각을 유연하게 했고, 아무것도 없던 그 시절, 내 안에서 피어난 관심은 나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호기심을 따라 움직였고, 그 흐름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의 관찰일지를 쓰며 나 자신의 관찰일지도 쓰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꺼지지 않는 호기심과 도전, 확장과 연결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나는 유아교육을 하다 현대무용에 관심을 갖고 세종대 공연예술대학원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전산회계 자격증을 따고 재무회계 일을 하다가 지금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고, 디지털 도구 ‘노션’을 가르치는 강사로도 활동한다.
이과, 문과, 남자 일, 여자 일, 할 수 있는 일과 못 하는 일. 내게 그런 경계는 없다. 관심이 생기면 시도하고, 몰입하고, 실험한다. 지금,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나를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즐거움과 호기심이다.
이 일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어떤 재미와 만족을 줄까?
이렇게 시작되는 게, 바로 놀이였다.
아이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이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무엇을 바라보지?
어디로 움직이지?
무엇을 하고 놀지?
8개월 된 아들이 우쿨렐레를 두드리면 나는 노래를 불러주었고, 기저귀 찬 아이가 어른용 가위를 잡고 종이를 자르면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나는 놀이의 조력자가 아니라, 놀이의 동참자였다.
“어마~ 여기~ 안자~ 곤뇽~”
아이가 나를 옆자리로 부르면, 나는 어른용 가위를 똑바로 잡아주기보다 다른 가위를 꺼내 같이 공룡 모양을 오렸다. 그렇게 내가 살아온 방식, 놀이를 이어나가는 나만의 방식은 결국 나의 기질이자 강점이 되었고, 아이들에게도 자발적 동기에서 시작된 놀이 안에서 잠재력이 폭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다만, 방치가 아닌 지지와 관심 안에서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안전하게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돕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세 아이의 육아를 관찰과 지지, 환경 설계, 그리고 놀이 동참자로 살아냈다.
요즘은 학원이 참 많다. 여기는 교육 중심지인 서울이 아닌 인천인데도 아이들은 놀 친구가 없다. 친구들의 학원 시간을 피해 놀아야 한다. 그 아이들의 시간이 참 아깝다. 마음껏 호기심을 느끼고, 하고 싶은 걸 따라
실험하고 시도해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간에 어른들이 정해준 방법만 반복하고 있다.
아이들은 자기 안의 씨앗을 꺼내볼 시간이 없다. 이 글은 그런 아이들을 위해 썼다. 아이에겐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의 열쇠는 부모가 쥐고 있다. 조급함에 채워버린 자유와 놀이의 자물쇠를 풀고, 아이들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다.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나는 믿는다.
아이의 행복이 곧,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