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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리스러브 이유미 Aug 09. 2022

세 번의 산후 우울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지독한 일 중독자의 이야기

일 중독의 징후들

1. 장시간 일을 한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경우에도)
2. 업무로 인해 개인적인 관계로부터 단절된다.
3. 일과 관련되어 집착하게 된다.
4. 성과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된다.
5. 일과 프로젝트로 인해 수면량을 줄인다.
6. 일에 실패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과잉 적응 증후군이라고도 하는 일중독의 징후들이다. 일 중독에 빠져있을 때는 몰랐는데 나는 지독한 일 중독자였다.




#첫 번째 산후 우울증



산 후 우울증이라고 생각 못했다. 지금 돌아보니 지독히 두려웠고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은 우울증을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스물아홉, 해외 무용 공연으로 한참 바쁘던 때에 생각지 못한 아이가 생겼다. (나는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유치원에서 근무하다가, 뒤늦게 선교 무용을 접하고 공연 예술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국내 무용 공연을 안무,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출산 전날까지 공연 기획을 하다 다음날 아침 양수가 터져 첫 애를 출산했다. 몸을 움직이는 일을 했던 나는 산 후 둔해진 움직임, 근육통과 부종, 예민한 아이의 불규칙적인 수면으로 피로도가 쌓이면서 그동안 해던 일이 끝나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몰려왔다. 한 달이 지났다. 매일 밤이면 2시간마다 깨서 젖을 찾는 아이가 먹을 젖을 짜 놓고, 유축기를 가지고 공연 준비를 위해 차를 몰았다. 젖이 불어 땡땡해지면 빈 교실을 찾아가 유축기로 젖을 짜 냈다. 불규칙한 수유 습관으로 아이는 엄마의 젖에 집착했고, 그래도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일을 그만 두면 아이와 함께 땅으로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3번의 유선염으로 입원을 하면서 급격하게 체력은 떨어졌고, 그래도 몸이 회복되면 다시 일을 나갔다.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는 날은 아이를 데리고 공연 연습실에 갔다. 빈 교실에 모기장을 씌워 재웠는데 딸이 울어서 가보니 모기가 얼굴이며 팔다리를 다 물어뜯었다. 그런 아이를 보면 또 죄책감에 마음이 무너졌다. 내게 일은 사는 희망이었고, 두려움에 사라질 것만 같은 나를 붙잡아 주었다. 딸이 돌이 지났을 무렵 남미와 북미, 캐나다까지 40일 해외 공연을 갔다. 40일이 지난 후 공항에서 만난 딸은 훌쩍 커 있었다. 아이가  살이 되고 걸어 다닐 때쯤엔 아이와 지하철을 타고 2시간 가까이 되는 거리를 오갔다. 겨울이면 붕어빵을 호호 불며 지하철을 기다리고, 비 오는 날은 지하철 역 국수 한 그릇을 말아먹으 그렇게 일을 놓지 않고 다녔다. 둘째는 생각도 못했다. 첫 째 만으로 버거웠고, 자연스럽게 둘째는 내 삶에 없을 것 같이 느껴졌다. 현대무용 독무를 자랑스럽게 마치던 해에 둘째를 가졌다.




#두 번째 산후 우울증



딸이 여섯 살일 때 둘째가 태어났다. 아이 둘을 데리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공연을 하기는 무리였다. 나는 아이 둘과 집에 남겨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에 지쳐있을 때는 집에서 쉬면 펀안할 줄 알았는데 막상 아이 둘과 남겨진 집은 무거운 그림자가 나를 눌러 불안했다. 둘째가 예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는 짓이 예뻤고 순하게 잘 크는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그런데도 찾아오는 우울감은 어쩌지 못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마침 근처 어린이집 파트타임 교사 자리를 소개받았다. 6개월 된 아들을 어린이집에 등록하고 같이 출근을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건 좋았다. 그 자리가 인연이 되어 새로 개원하는 어린이집 원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낮에는 큰 딸을 데리고 어린이집 공사장을 오가며 교실을 세팅하고, 저녁이 되면 둘째가 어린이집 차를 타고 내가 근무하는 곳으로 다. 아이  교실에서 놀다 잠이 들었고, 나는 밤을 새우며 신설 원의 서류와 세팅에 집중했다. 돈이 목적도 아니었다. 보람도 중요하지 않았다. 무언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집중할 수 있는 일이면 나는 내 몸을 던졌다. 그렇게 2년을 근무하고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퇴사했다.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찾았다. 유치원을 돌며 특성화 강사를 하면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특강이 잡히면 1시간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봇짐같은 교구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녔다. 1시간 수업을 위해 전 날 저녁을 몽땅 수업 준비로 쓰기도 했다. 음악 퍼포먼스 놀이가 생각난다. 트랜스포머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박스를 모아 팔, 다리를 뚫고 호일로 반짝거리게 감쌌다. 딸에게 입혀 변신 틀을 만들고, 변신할 때 움직임도 불편하지 않게 꼼꼼히 챙겼다. 딸도 같이 도왔고, 아들도 풀칠, 가위질을 열심히 했다. 그 수업은 대박이 났다. 말 안 듣는 7살 남자아이들도 변신자동차 옷을 입어보겠다고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시간강사의 인연으로 새로 신설하는 유치원의 원감 자리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어 고사했다. 유치원은 떠난지 오래였고 교육청과 연계된 행정업무도 자신이 없었다. 실패할까봐 나의 부족함이 들통날까봐 겁났다.  원장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믿어주었고, 그때부터 나의 밤샘 작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 사이 체력이 떨어지니 마음은 더 우울해졌다. 그럴수록 더 일에 매달렸다. 수렁으로 빠져들 때쯤 셋째를 임신했다.




#세 번째 산 후 우울증



셋 째를 임신하고 일을 그만두면서 한 동안은 좋았다. 아이들도 안정적이었고, 나도 여유로웠다. 엄마를 독차지한 둘째는 마냥 좋은지 말도 잘 들었다. 배가 불러와 안정기에 접어들 때쯤 김포에 있는 유치원에서 원장으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애초에 유치원으로 갈 때 원장으로 추천해주겠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부담은 없었다. 무거운 배로 일을 하는 건 익숙했다. 인천에서 김포를 오가면 셋째가 태어날 때까지 자연이 좋은 유치원에서 근무를 했다. 셋째가 태어났다. 아이 셋을 데리고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불안했다. 내리사랑이라고 셋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뻤다. 그러다 불쑥불쑥 해결되지 않은 우울감이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하게 집을 이리저리 돌았다. 마음을 잡기 위해 일에 매달려 왔기 때문에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다시 무언가 해야 했다. 마침 일하던 곳에서 감사 준비를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늘 시작은 3~4시간 적은 시간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점차 나는 욕심을 내고, 시간이 늘었다. 일에 집착했고, 성과를 내야된다는 생각에 더 매달렸다. 셋째를 베이비 카시트에 앉혀 발가락으로 흔들며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 범퍼 의자에 앉혀 책상 에 두고 간식을 손에 들려주며 일을 했다. 첫째와 둘째는 챙겨놓은 밥을 먹거나 남편이 와서 챙겼다. 아이가 9개월이 될 무렵 40일의 원장 연수를 다녀왔다. 그리고 막 걸음마를 할 때쯤 열흘 해외연수를 가는 엄마를 아장아장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아이들은 스스로 또는 남편과 잘 지냈다. 또 한 번의 이직과 야근이 이어졌다.




#네 번째 우울증에 나를 돌보기 시작하다.



큰 딸이 사춘기가 되면서 청소년 우울증이 찾아왔다. 잦은 싸움에 그동안 일의 무게로 짖눌러 놓은 내 우울증도 발화되었다. 그제야 딸과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딸이 약을 먹었고, 더 이상 일에 매달릴 수 없게 되었다. 강제 종료. 일로 도망 다니던 나는 비로소 현실을 봤고, 엄마의 자리에 있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상담을 받으면서 나와 가족을 보호하며 일 하는 방법을 배워갔다. 일을 하지 않고도 스스로 마음을 돌볼 수 있는 방법. 딸과 1년의 상담치료와 화해의 과정을 책으로 썼다. 이 또한 무언가를 해야하는 내가 글에 매달렸던 것 같다. 다른 점은 글쓰기는 나를 위한 일이었다. 나를 돌보는 일이었고, 나를 새롭게 하는 일이었다. 글을 쓰면서 나라는 사람을 모두 꺼내어 펼쳐 보았고,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들은 묻는다. 세 아이를 키우며 어떻게 그 일들을 해왔냐고. 지금도 책 쓰기, 온라인 프로젝트까지 어떻게 다 하냐고. 아마도 일에 매달려 오던 습관이 나를 이끄는 것 같다. 다만 일 중독이 되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을 돌보고, 집착하거나 스트레스 받을 때 거리를 두고 잠시 쉬는 연습을 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후회하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도 그렇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때는 그저 그 방법이 살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그래도 무너지지 않고 무엇에라도 매달렸던 나를 다독이고 싶다고. 균형이 맞지 않는 삶으로 가족도 나도 힘들었지만 우울이라는 무거운 추를 견디기 위해 감정을 일에 쏟아 균형을 맞춘 거라고. 후회하지 않는 삶이 어디 있을까. 그저 자책으로 다시 우울함을 떠안지 않도록 지금의 나를 온전히 받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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