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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Feb 26. 2021

병든 연애를 위한 변명

한 겹 더 들춰보는 연애 이야기 (10) 

너무 힘든 연애를 한 적이 있었다.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어디서든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고 싶어 믿을만한 친구나 지인에게 상황을 털어놓곤 했다. 하루는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두 사람은 건강한 관계가 아니네요.” 

총체적이고 결정적인 선언이었다.    

  

건강하지 못하다


곪을 대로 곪아있는 문제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무척 속상했다. 

굉장한 열등감이 몰려왔다. 

나의 연애는 왜 건강하지 못할까? 남들은 어떻게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까? 나는 왜 이 연애가 병들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과감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연애는 끝이 났다. 하지만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 덕에 끝낸 건 아니다. 

내 경험상 연애의 끝은 다 때가 있다. 어차피 안될 관계라고 해도, 또 그것을 본인이 알고 있다고 해도, 누가 옆에서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결별을 앞당기지는 못한다. 해볼 만큼 해봐야 때가 온다. 그때 헤어져야  아무 미련도 남지 않고 속이 시원하다.      


헤어지고 나니 날아갈 것 같았다. 물론 갈등은 많았지만 좋은 순간들도 있었으니까 연애를 지속했을 텐데, 끝내고 나니까 그야말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몸과 마음이 유연해지면서 동시에 강해진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뭐지? 오랫동열탕에서 버티다가 냉탕에 뛰어들 느끼는 일시적인 상쾌함인가?' 


그즈음 <동의보감>을 공부하다가 그 기분이 단지 기분만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의 몸은 이물질이 침입하면 면역반응을 일으킨다. 염증이 생기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열이 나고 콧물을 흘리고 가래가 끓는 증상들은 모두 내 몸에 침투한 생소하고 낯선 생명체에 반응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흔하게는 감기가 그러한데, 이런 현상을 큰 범위에서는 ‘병’이라고 일컫는다.     


같은 이치로 내 삶에 낯선 존재가 들어오는 사건도 일종의 병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의 열병’이란 말은 시적인 은유에만 그치는 것 같지 않다. 

‘타인’이라는 이질적 존재는 내 삶의 체계를 마구 흩트리고 공격한다. 완전히 생소한 한 생명체와 사귀는 일은 일종의 ‘투병’이다.      


그런데 병에 걸리지 않는 게 꼭 최선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병은 면역체계를 훈련시키고 강화시킨다. 

치명적인 정도가 아니라면 병을 겪으면서 우리의 몸은 어떤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능력이 향상되기도 한다. 에너지의 흐름이 재편되면서 더 건강한 몸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까닭에 어떤 분은 오랫동안 감기에 걸리지 않으면 찬물에 몸을 담그거나 찬바람을 쐬어서 일부러 감기를 겪는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몹시도 고단하고 힘겨웠던 연애를 끝냈을 때 나는 조금이나마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다. 

이질적인 광기와 무절제와 결핍과 편견의 어지러운 침투에 맞서 싸우며 나의 내면의 힘은 조금씩 자라난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앓는 게 두려워서 예방주사를 맞는다. 연애의 팁과 남녀관계의 정석과 경험자의 노하우를 미리 공부하고 연구하여 신중하게 준비한다. 

안전한 방법일 수는 있다. 하지만 직접 앓고 난 다음 나의 삶 속에 형성된 면역체계는 그만큼 더 확실하지 않을까 싶다.    

 

허약할 때는 병에 자주 걸린다. 건강하지 못한 연애를 겪게 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건 내가 안고 있는 삶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힘들지만 병을 잘 치르면 된다. 호되게 앓고 나면 그 문제들은 하나씩 치유될 것이다.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혹은 병에 걸린 줄도 몰랐다면, 잠복해있던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병을 겪어서 점차 강해지면 병에 잘 걸리지 않게 된다. 

어느 순간 나에게 다가온 생명체는 싸워야 할 이물질이 아니라 나를 도우러 오는 또 다른 ‘나’가 된다.     


그러니 병든 연애도 괜찮다. 다만 같은 병에 걸리지는 말자. 아픈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불치의 병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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