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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Jan 30. 2021

너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한 겹 더 들춰보는 연애 이야기 (7)

나의 연인은 어떤 사람일까? 나를 만나기 전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어떤 사람들을 만났을까? 어떤 연애를 하고 어떤 사랑을 했을까? 혹시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면을 갖고 있진 않을까?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두 사람이 함께 할 미래를 향한 설렘으로 둥실 떠오르다가도 내가 모르는 상대의 과거에 대한 불안은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발목을 끌어내린다. 

희미하지만 의외로 질긴 이 불안은 카페에 마주 앉거나 드라이브를 할 때 혹은 손잡고 강변을 걸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한 호기심으로 질문하고 답을 듣다 보면 조금씩 해소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상대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게 되고 모든 정보를 취합한다고 해서 불안의 요소가 없어질 수 있을까? 게다가 한 사람의 과거를 안다는 것과 그 사람을 안다는 건 같은 것일까? 


내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바에 의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를 참 좋아한다. 나 또한 그렇다. 

본인에 관해서라면 가볍게 슬쩍 던진 질문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충실하게 대답한다. 특정한 이유로 숨겨야 할 과거가 아닌 이상 자기가 겪은 일과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되도록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한다. 특히 가깝거나 좋아하는 사람에게라면 더욱 실감 나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욕구가 연인 사이에서 생겨나는 건 사실 비이성적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향해 나를 열어 보이고 싶은 욕구, 그럼으로써 그 사람으로부터 공감을 얻고 싶은 욕구인데, 모순되게도 과거 경험담이 드라마틱하고 생생해질수록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공감하는 만큼 반감도 생기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의 십 년 전 애달픈 짝사랑 이야기나, 못된 놈을 만나 속 썩었던 여자친구의 연애 실패담을 듣는 동안에는 함께 슬퍼하고 함께 분노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후에 스멀스멀 밀려오는 씁쓸한 기분은 우리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다. 


'어? 내가 쿨하지 못하게 왜 이러지? 다 지나간 과거일 뿐인데 내가 왜 질투를 하고 있는 거지?'


이런 감정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으니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가 '이 정도로 상대를 좋아하고 있구나!'하고 스스로를 인정해주면 그 어리석은 감정은 알아서 누그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아가 약하고 자존감이 낮은 경우 부당하게 상대를 괴롭히기도 하는데 이것만큼은 애정이라는 변명으로 봐주어서는 안 된다. 만일 연인이 나의 과거의 일을 문제 삼는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헤어져야 한다.  


단언하건대 과거는 현재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나의 과거도 그렇고 상대의 과거도 그렇다. 


첫 번째 이유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바뀐다고 한다. 피부와 내장기관과 혈액과 뼈와 뇌와 신경세포까지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바뀐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쉼 없이 변하고 있다. 세포가 바뀌면 존재도 바뀌는 게 당연한 이치다.  


이 명백한 과학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의 탓이거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굳어진 타성 때문일 것이다. 


과거는 이미 어떤 밑거름이 되어 현재의 나에게 기여하고 사라졌다. 

지금 내 모습에 미치는 과거의 영향이란 완전하게 '화학적'이다. 가축의 분뇨로 채소를 키워낸 것과 같다. 

신선한 샐러드를 보면서 거름이 되었던 똥을 떠올린다면 얼마나 대책 없는 난센스인가? 눈부시게 피어났던 꽃잎을 기억하며 이미 썩어 문드러진 잔해에 미련을 두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현존 앞에서 과거를 더듬거나 끄집어내는 건 바보짓이다.     


두 번째, 과거의 일은 실패든 성공이든 어느 쪽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통 지난날의 과오는 반성하고 되풀이하지 않으려 하지만, 성공했던 경험은 소중히 간직하면서 그 방식을 삶의 지혜로 저장하려 한다. 성공을 가져다준 방식이니까 계속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착각이다.  


그리스 비극의 기본적인 구조는 위대한 영웅이 어떤 결함으로 인해 불행한 파국을 맞게 되는 이야기이다.

아니, 도대체 모든 면에서 훌륭한 주인공에게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만한 무슨 치명적인 결함이 있을 수 있으며, 또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국가적인 행사로 공연을 했을까?  


아무리 뛰어난 인간일지라도, 아니 어쩌면 뛰어난 인간일수록 더 갖기 쉬운 결정적인 결함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불행의 씨앗이라는 교훈은 온 국민에게 보여줘야 할 정도로 중요했던 것 같다. 


그 결함을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한다. 하마르티아에 대한 정의와 해석은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정도(正道)를 벗어남' '판단력을 잃음' 등 외에 다양한 해석들은 과연 인간을 불행에 빠뜨리는 결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을 드러내는데, 그중 어디선가 읽었던 해석은 참으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하마르티아란 '과거에 성공했던 방식을 똑같이 되풀이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언뜻 들어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직접 해보고 좋은 결과를 얻어낸 방식이니까 그 방식에 확신을 갖고 계속 적용하려는 것인데 그게 왜 잘못일까? 


원인은 단순하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현재는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와 달라졌으므로 현재에 맞는 방식을 새롭게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옳다는 확신, 즉 자만심 때문이다. 

성공을 경험한 사람, 인정받아 어떤 권위를 얻게 된 사람일수록 이러한 자만에 빠지기 쉽다. 


연애를 할 때 과거의 실패로부터 얻은 교훈이나 성공에서 얻은 자신감을 현재의 관계에 적용하려 한다면 불행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또다시 실패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혹은 이번엔 더 잘하고 싶기 때문에 과거의 실패와 성공으로부터 얻은 지혜를 총동원하여 정확하게 분석하고 판단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치명적인 과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패보다는 성공의 경험에서 얻은 자신감을 더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사실 방법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안다'는 게 얼마나 웃기는 착각인지, 알 수 없다는 불안 또한 얼마나 헛된 망상인지 깨닫는다면, 꼼꼼하게 모으고 치밀하게 분석된 정보를 깔고 앉았을 때와 다른,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평온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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