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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Feb 14. 2021

사랑이 변하다

한 겹 더 들춰보는 연애 이야기 (9)

2018년 겨울, 뜨겁고 찬란한 어떤 아열대의 섬에서 두어 달을 머무는 동안 나는 '개방적 연애(Open Relationship)'라는 주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 섬엔 비교적 자유로운 성향을 가졌거나, 혹은 자유를 갈망하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모여있었다. 

돌이켜보건대 그 섬에 모여든 우리들은 자신이 원하고 또 원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모호한 상태로, 또한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게,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러한 목마름은 뭔가 새롭고 파격적이고 모험적인 세계를 향해 우리의 눈과 귀를 활짝 열어주었던 것 같다. 낯선 이들의 색다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이게 대체 뭐하는 모임인가 싶은 행사에 선뜻 참여하게 되고, 별 해괴한 클래스도 다 있구나 싶은 수업에 들어가는 일들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다양한 때와 장소에서 연애는 꾸준하면서도 늘 신선한 주제로 떠올랐다.    

       

대기업 간부로 일한다는 한 독일 남자는 식어버린 부부관계의 열정을 되살려 보고 싶어서 아내와 함께 Swinger Club에 갔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까다로운 신분 증명 절차와 엄격한 드레스 코드를 요구하는 비밀스러운 클럽의 경험담을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영화 <아이즈와이드셧>이 연상되었고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지만 부도덕하다거나 타락했다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아름답고 젊은 캐나다 여성은 두 명의 남자친구와 상호 합의 하에 동시에 사귀고 있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순위가 생기더라며 1순위인 남자친구와 함께 긴 휴가를 즐기고 있었는데, 또래 여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해주는 모습은 대단한 선구자처럼 보였다.     


프랑스 사람인 자기 남편이 다른 남자들을 사귀어보라고 추천해줘서 이 섬에 오게 되었다던 터키 여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믿기지 않아서 내가 영어를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그녀는 실제로 여러 남자들을 사귀었고 성관계를 했으며 그럴 때마다 모든 이슈를 시시콜콜히 전화로 남편에게 보고하곤 했다.      


나는 번번이 놀라긴 했으나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늘 품어왔던 사랑에 대한 탐구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그때까지 내가 겪은 연애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라기보다는 번민하고 갈등하면서 투쟁해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투쟁의 과정을 힘겹게 통과하며 나는 늘 ‘진실한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부딪히곤 했다.      

   

나를 놀라게 한 사람들 중엔 사랑과 연애에 관한 파격, 자유와 해방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정당화시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기심과 집착을 버리고 인격적인 완성을 이루려는 수행의 차원에서 새로운 방식의 사랑을 선택한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사랑을 신앙처럼 절대적인 진리로 여기고 있었던 나는 그들에게서 추출해 낸 사랑의 정의야말로 그 진리에 거의 다가간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사랑은 배타적이지 않다.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 혼자만 먹으려 하기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좋은 물건을 내 것이라고 움켜쥐기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두루두루 나누어 쓰는 것이 사랑이라면,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나 혼자만 독차지하려는 집착과 욕심을 버려야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모두가 평등하게 누리는 세상의 비전을 보여주는 공산주의 이론처럼 아름다웠다. 

나눌수록 커진다는 행복의 법칙은 이성관계에도 적용되어야 마땅한 것 같았다.      

  

당시 나를 매료시킨 건, 이미 알고 있던 ‘폴리아모리(Polyamory)’나 ‘밍글스(Mingles 혹은 Friends with Benefits)’등과는 차별되는 지점이었다.

한 사람에게만 매여있지 않고 여러 상대와 즐기겠다는 취향 혹은 욕망과는 다른 것이었다. 독점욕과 집착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택한 대안도 아니었다. 소유하거나 소유되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가치관의 문제도 아니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라이프 스타일의 차원도 아니었다.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떠한 사랑이 가장 순수한 것인가에 대한 궁극의 해답을 '개방적 연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폴리아모리’나 ‘밍글스’처럼 유리한 것을 취하겠다는 태도와는 오히려 반대로, 불리한 점을 알지만 감수하고 내게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해가며 희생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며 그 실천이 바로 ‘개방적 연애’가 아닐까 싶었다. 

    

한동안 그런 이상을 꿈꾸었었다.      

그리고 지금은 꿈에서 깼다.      


몇 번의 시도가 실패하기도 했지만 그 실망감 때문은 아니다. 

‘개방적 연애’든 ‘모노가미(Monogamy)’든 사랑에 대한 너무 숭고한 목표를 세우고 집착했던 나 자신이 슬슬 한심해지고 우스워졌다. 

고귀한 사랑을 이루겠다며 용인했던 바보짓을 후회했고 가당치않은 영웅심을 내려놓았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성경 말씀은 여전히 귀하고, 사랑이란 저절로 찾아오는 즐거운 감정이 아니라 노력하고 연마해야 할 기술이라는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리히 프롬)의 가르침도 여전히 감동적이지만, 내가 꼭 이 위대한 수업의 우등생이 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열등생이어도 좋다. 그래야 누구든 나를 친절한 마음으로 이끌어 줄 테니 말이다. 

게을러진 걸까? 아니면 너무 열심히 살았던 걸까? 

아무튼... 

나의 사랑은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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