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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Feb 07. 2021

달콤함을 위한 새로운 레시피

한 겹 더 들춰보는 연애 이야기 (8)  

연애의 가장 달콤한 순간을 꼽으라면 언제일까?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지만 나 혼자만 그런 걸까 봐 가슴 졸이며 애태우기만 하던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아마도 그때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서로 미세하게 떨리는 두 사람의 손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엮이는 온화한 순간일 수도 있지만, 터질듯한 마음을 부여잡고 돌아설 때 뒤에서 와락 껴안는다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갑자기 입술을 덮쳐오는 박력 있는 키스와 같이 드라마틱한 사건일 수도 있다.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면 우리는 ‘어머, 어머!! 꺄악-’ 하면서 민망함과 부러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이렇게 아찔한 장면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런 식의 황홀하고 가슴 설레는 순간을 꿈꿔보아도 되는 건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여자와 남자가 사귀면서 애정을 표현하고 신체적인 접촉을 할 때에 반드시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포옹을 하거나 키스를 할 때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저 남자는 여자를 뒤에서 껴안기 전에 “저어, 제가 뒤쪽에서 당신을 안아도 될까요?”라고 묻고 동의를 구하지 않았을까? 왜 저 남자는 “지금 당신에게 키스를 해도 되나요?”라고 먼저 묻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키스를 했단 말인가?       


서로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지, 남자의 스킨십을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인데,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껴안거나 키스를 했다면, 여자가 그것을 문제 삼았을 때 명백한 성추행이 된다.      


조금 더 과격한 경우로, 너랑 나는 정말 안 맞는다며 티격태격 싸우는 여자와 남자, 혹은 팽팽한 라이벌이 되어 경쟁하던 두 남녀가 갈등과 대립의 정점에서 갑자기 서로를 뜨겁게 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TV 드라마와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연출되는 장면이다.     


실제로도 그런 상황은 있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전혀 다정하지 않다. 서로 흉을 보고 깎아내리고 공격한다. 하지만 속마음은 정반대다. 상대를 향해 타오르는 욕망을 감추고자 더 차갑고 더 가혹하게 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두 사람이 강하게 부딪혀 그 뜨거운 불길에 휩싸일 때 거기엔 분명 일정 정도의 폭력이 포함될 수 있다. 저항하는 여자의 팔목을 남자가 강하게 붙들어서 꼼짝 못 하게 만든다거나 남자의 가슴팍을 때리며 몸부림치는 여자를 남자가 번쩍 들어 올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누가 알겠는가? 저 행위가 황홀했는지 모욕적이었는지, 연정이었는지 폭력이었는지, 고단수의 배려였는지 학대였는지... 당사자가 아니면 판단할 수 없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한다면 참으로 곤란해진다. 

    

쉽지 않은 문제다. 

남자의 박력 있는 행동이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팽팽한 줄다리기 게임을 즐기는 여자의 새침함을 정말 싫다는 표현과 헷갈리지 않으려면, 모든 애정표현에 앞서 언제나 먼저 그렇게 해도 되겠는지를 물어봐야 하겠는데, 그렇게 묻는 순간 모든 설렘과 낭만은 사라진다.      


페미니스트임을 천명하는 나는 ‘미투’ 운동을 지지하고 모두가 ‘성인지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연애라는 지극한 섬세한 감정의 결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수만 가지 리듬과 색깔 속에서 ‘먼저 상대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와 같은 지침을 적용한다는 것은 한편으론 슬프고 한편으론 웃기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 사안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남자가 여자가 싫다는 데도 ‘속으론 좋으면서...’라고 넘겨짚는 착각이다. 왜냐면 이것은 종종 착각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자는 내숭을 떤다! 여자라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여자의 잘못이 아니다. 자기의 성적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여자를 천박하게 여겼던 과거의 잘못된 통념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전 세대만 해도 남자의 애정표현과 손길을 원하는 여자를 ‘밝히는’ 혹은 ‘굶주린’ 여자라며 흉을 보았기에 여자는 내숭을 떨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에 따라 남자는 여자가 표현하지 않는 것을 알아서 눈치채 주어야 하는 너무도 까다로운 의무를 감당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여자가 먼저 구애를 한다든가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로맨틱 스토리 속에서 소위 ‘심쿵’을 유도하는 장면은 남자가 애정을 바치고 여자가 그것을 받아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아직도 많은 여자들이 꿈꾸는 달콤한 연애 속에서 ‘내숭’이란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악순환이 예상된다. 로맨스의 판타지를 위해 여자들이 내숭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남자들의 착각도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며, 소위 '밀당'과 '성추행, 성폭력'의 진실게임은 법적 갈등으로 심화될 테고, 그 예방책으로 연애 시 ‘동의를 구할 것’이라는 지침은 더욱 강화되어 결국 로맨스의 달콤한 순간들은 소멸될 것이다.           


해결책의 열쇠는 여자가 쥐고 있다. 

아닌 척 내숭을 떨면서 남자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가? 착각에 빠진 남자가 성추행을 해올지도 모를 위험을 감당해야 한다. 나아가 나의 내숭이 다른 여성들까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더이상 '미투'를 외치며 피해를 호소하는 여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면, '성인지감수성'이 떨어지는 남자들이 저지르는 성추행을 보고 싶지 않다면, 이 고루한 판을 여자가 나서서 뒤집어야 한다. 


당당하고 주도적인 애정표현으로 설렘과 달콤함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창의력을 발휘해보자. 

상상이 안된다고? 천만에! 할 수 있다. 여자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무한한 창조력을 지닌 여성성의 힘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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