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호텔, 일개미의 catnap

by RNJ Apr 04. 2023


  '호텔'은 아이들에게 낯선 장소입니다. 삭막한 회색빛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은 잘 꾸며진 로비, 깔끔한 양복을 입은 직원, 성대한 조식 뷔페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어른들의 장소'. 아이들은 호텔이 주는 이질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캐리어 손잡이에 슬쩍 손을 걸친 채 당당한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지르고, 지하 1층 조식 뷔페에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내려옵니다. 또래보다 능숙하고, 성숙해 보이기 위해 애를 쓰지만 "쌤, 카드키 놓고 나왔어요." "데스크 가면 물 줘요? 같이 가주면 안 돼요? 부끄러워요"같은 말을 하며 쩔쩔 메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학생들은 덩치만 컸지 영락없는 어린이입니다.


저의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떠올려보자면... 호텔은커녕 10명이 넘는 건장한 아이들을 쿰쿰한 '닭장'같은 공간에 욱여넣었죠. 조금... 불편했지만 친구들과 밤새 떠들고, 베개 싸움을 하고, TV로 영화를 보며 선생님이 몰래 넣어준 '어른의 음료'와 새우깡을 즐겼습니다. 코로나가 끝나지 않은 시기에 제주도를 찾아온 아이들은 보다 고급스러운 호텔방 하나를 2~3명이 독차지합니다. 세상 참 좋아졌죠? 그런데 학생들이 이런 상황을 마냥 좋아하진 않습니다.


 혹시 코로나가 퍼질지도 모르니 한방에 최소한의 아이들을 배정하고, 같은 이유로 학생들은  다른 친구들의 방에 놀러 가는 것을 금지당합니다. 어떤 학교는 편의점을 포함한 일체의 편의시설 사용을 제한해서 학생들이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오기도 했죠. 일부 학생들은 호텔을 '감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은 선생님과 지도사의 눈을 피해 스파이더맨처럼 이 방 저 방을 날아다닙니다. "마스크라도 잘 쓰고 나와! 제발!"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밤을 지새우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어쩔 방도가 없었죠.


 생소한 공간인지라 아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도 많았습니다. "제발 뛰지 마세요, 다른 손님도 있다, 실내용 슬리퍼 신고 나오지 마세요, 물이랑 수건은 데스크에 연락해라, 소리 지르면 안 됩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를 했건만 학생들은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상태로 발견됩니다. 카드키를 잃어버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 메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란! 이런 학생들이 매일 5~10명 정도는 꼭 나오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지도사와 호텔 직원들은 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힘드시죠?" "이제 뭐 익숙합니다" 


 안전 지도사도 보통은 멀끔한 호텔방을 하나 배정받습니다. 그리고 호텔 조식에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죠. 복리후생이 제법 괜찮은 업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만, 성수기에 방이 모자랄 땐 버스 기사님, 여행사 직원과 함께 더블 침대에서 자거나, 물도 나오지 않는 직원 객실 2층 침대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때도 많았죠. 다음날 일정이 조금 빠르다면 달콤한 쪽잠의 맛만 대강 보고 아이들을 깨우러 가고, 혹시 탈출하는 아이가 없는지 불침번도 서야 합니다. 커피랑 조식을 살기 위해서 입 안으로 욱여넣습니다. 가끔은 죽어라 일하는 일개미가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밤 10시가 되면 지도사는 마지막 업무인 점호를 시작합니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안색을 살피고, 다음날 일정과 유의사항을 미리 안내합니다. 내일이 떠나는 날이면 짐을 다 쌌는지도 확인해야 하죠. 학생이 시장에서 사 온 음식을 먹고 탈이 나서 밤늦게 응급실로 향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열이 있는 학생은 재빨리 격리 객실로 옮겨서 상태를 지켜봐야 했죠.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누적된 피로가 안색에 그대로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꼼꼼한 선생님들은 스리슬쩍 다가와 음료수 한 병을 주머니에 넣어줍니다. 아이들은 치킨과 회를 같이 먹자며 저의 손을 끌어당깁니다. '제발, 퇴근해서 잠 좀 자게 해 줘!'


 일정을 마친 지도사는 곤죽이 되어 쪽잠에 빠져듭니다. 아이들은 밤을 지새우고, 야간 담당자는 호텔 복도와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을 쫓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식당에 내려가 에스프레소에 설탕 두 티백을 때려 넣습니다. 밤을 지새운 많은 아이들이 식당에 내려오지 않고 있네요. 그래도 아침은 먹여야 하니 지친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릅니다. 학생과 지도사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피로에 찌든 우리들의 평범한 하루가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이전 10화 새별오름, 코로나 시대의 학생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