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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육아시 2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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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NJ Apr 11. 2024

항파두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장소가 있다. 바로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지는 제주 시민들 사이에서 꽃 구경하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나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해바라기와 유채꽃, 벚꽃과 동백꽃을 만났다. 아직까지 발굴이 끝나지 않은 내성() 건너편에는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기에 적당한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있다.


 우리는 비교적 한적한 외성, 토성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아이를 품에 들고 토성을 오르내리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아비의 땀방울이 무색하게 아기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0살 아기에게 무언갈 보여주기에 이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부지런히 아이를 데리고 짧은 여행을 떠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4살 이전의 일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아이의 첫 3~4년은 부모를 위한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원하는 옷을 마음껏 입혀보고, 둘만의 추억이 서린 장소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최후의 기회.


 주인 잃은 군대의 마지막 항전지에서 새로운 주인을 찾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분명히 지난할 것이다. 그러나 결말을 앎에도 누군가는 묵묵히 돌을 쌓아 올린다. 보호의 장벽이자 우리가 덮을 무덤의 감촉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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