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시야마의 텐류지
"Less but better."
가전회사 브라운의 전설적인 디자이너였던 디터 람스는 프랑크푸르트 헤센주의 한 언덕 위에 위치한 자택의 정원을 일본식으로 꾸몄다. 그는 일본 건축의 정수를 압축된 간결함으로 정의했고 일본의 미학이 유럽의 미학보다 우수하다 평가하였다. 업계의 원로가 된 디터 람스는 일본에서 회고전을 개최하였고 자리를 빛내준 일본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50년간의 노하우를 전수했는데, 그는 젊은 세대가 마주한 최대 난제인 환경 파괴와 무분별한 소비주의에 대한 경고를 남겼다. 30살에 브라운의 최연소 수석디자이너의 자리에 올랐던 디터 람스는 90살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디자인이 삶과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이에 맞춰 행동하고 있었다.
독일인인 디터 람스가 일본의 정원에서 큰 기쁨을 발견한 이유는 한국인으로서 그저 막연하게 상상만 할 뿐이었다. 그 이유를 발견하고자 이번 일본 여행에 정원을 꼭 다녀오리라 마음을 먹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특별'명승지라는 거대하고 긴 직함을 가진 텐류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알프스 능선에 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문명의 이기를 초월하는 위압감에 압도당했고, 베르사유 궁전의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허영과 인위의 결과물에 전심을 모두 빼앗기곤 했다. 이와 달리 돌과 물과 나무로 이루어진, 인간의 거처 안에 갇힌 정원의 아름다움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할 것이라 생각했다.
1339년에 사망한 고다이고 천황을 애도하고자 지어진 텐류지는 1345년에 창건되었고 무소 소세키가 조사(造寺), 절의 건립을 주도하였다. 무소 소세키는 정원을 설계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선종 스님이었고 그의 손이 빚어낸 사이호지와 텐류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선종 불교의 '선'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데 있어서 소세키의 실력을 따라올 자가 없었는데 텐류지를 건설할 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바로 천황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이 일찍이 소진되어 버린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건축 비용은 예상치를 가뿐히 뛰어넘어 돈 먹는 하마로 변신하기 일쑤였고, 자금을 확보하고자 했던 무소 소세키는 10년 동안 중단되었던 대-원나라 무역의 재개를 요구한다.
당시에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쿠빌라이 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고 때마침 후계자 테무르칸이 국교 회복을 원하였기에 텐류지선과 같은 대-원나라 무역이 종종 이루어졌었다. 무역의 성사여부와 상관없이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였고 마침내 텐류지 조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평민들이 사랑했던 선종을 대폭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선종의 한 종파인 임제종 승려였던 무소 소세키는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국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가 텐류지의 건립에 이토록 열성이었던 이유는 죽은 천황에 대한 보은의 마음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무소 소세키에게 텐류지 건립을 명한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한때 고다이고 천황과 힘을 합쳐 가마쿠라 막부에 대항했고, 이후 독립된 세력을 이끌고 고다이고 천황을 쫓아낸 다음 북조의 쇼군이 된 인물이다. 천황에게 칼을 겨누었던 타카우지가 천황을 기리는 절을 건립하기로 마음먹는 이유는 스승으로 모시던 소세키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인과 결과만 뚝 떼어놓고 보니 소세키가 소세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고 자신에게 복종했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해 명령을 완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어진 텐류지는 8차례의 큰 화재가 있었으나 무소 소세키의 소켄지 정원은 반-자연물인 덕에 거의 700년 가까이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곳은 일본에 흔한 '지천회유식' 정원 중 하나인데 연못 주변을 걸으며 풍광을 즐길 수 있으며, 돌과 나무가 산세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자연과 정원의 경계를 흐트러뜨리고 있다. 방장 남쪽과 연못의 한편에는 '가레산스이'라고 하는 선종의 교리를 자갈로 표현한 물길이 있다. 천황이 중심이었던 헤이안 시대의 화려하고 과시적인 문화는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무사 계급이 추구하던 절제와 검소의 미의식에게 자리를 내어주었고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예술인 가레산스이, 전통 연극인 누, 다도와 추상적인 먹물 그림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주류 문화로 성장하였다. 저물어가는 천황의 시대가 떠오르는 무사의 미학으로 대체된 것이다.
* 절 내부와 정원을 함께 입장하는 티켓과 정원만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이 분리되어 있다. 가격차이는 약 5,000원.
한국으로 돌아온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소켄지는 여전히 잊을 수 없는 교토의 미소로 남았다. 이곳엔 어떤 인간도 재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7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을 거쳐간 무수한 풍파가 있었으나 정원은 살이 깎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풍성해졌다. 약 130년 전에 세워진 파리의 7,000톤짜리 철탑은 전체 철 구조물의 30% 정도에 부식이 진행되었고, 파리시는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60톤의 페인트로 탑을 재단장했다. 그러나 884개의 결함 중, 내구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68개의 구조물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에펠탑은 이 오래된 정원과는 달리, 후대가 오래된 자료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고대의 불가사의가 될지도 모르겠다.
* 텐류지 정원에서 따로 심어 가꾸는듯한 나무와 화초 앞에 집모양의 나무 이름표가 세워져 있는데, 한국 이름까지 꼼꼼히 적어두어 하나하나 배워가는 재미가 있다.
"We shape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공간의 힘에 주목한 영국의 전 총리가 폭격으로 무너진 의회의 재건을 주장하면서 남긴 명문장이다.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그 후에는 건물이 우리 인간을 만든다. 디터 람스의 말처럼 우리는 무엇을 파괴하고 무엇을 보존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중대한 지점에 서있다. 그는 미학과 효율성을 모두 겸비한 디자인을 통해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고자 했으며 후학들에게 일상이 된 환경 파괴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무소 소세키는 민중 교화에 힘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믿음과 철학을 공간 속에 구현하였고 이를 보존하고자 했던 후대의 열망이 우리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중개자로서 가치와 보존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공간의 일부로 존재하나 우리의 힘과 책임은 결코 시공간의 한 부분에만 작용하지 않는다.
아이는 텐류지 대방장의 마루와 기둥을 통통한 손으로 어루만졌다. 아이의 손길을 따라 조심스레 나무의 결을 쓸어보았다. 수백 년을 버텨온 나무 기둥은 두 살짜리 아이의 살결처럼 부드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