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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포레relifore Nov 17. 2021

내가 얼죽아가 된 이유

엄마가 되어간다는 것은


저도 처음부터 얼죽아는 아니었습니다.

더운 여름날이면 얼음이 찰랑거리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긴 했지만, 날씨가 쌀쌀해지면 따뜻한 아메리카노, 그리고 바닐라라떼를 즐기는 사람이었어요.

카페인을 많이 섭취하면 왠지 머리가 아파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류의 사람이긴하지만, 그래도 그 계절따라 골라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저에게 힐링과 휴식이 되어 주었습니다.


카페의 두껍고 무거운 문을 쓰윽, 힘차게 열고 들어가면 갑자기 훅, 하고 코 끝을 스치는 고소하고 쌉싸름한 특유의 원두 향기.

그리고 그 카페만의 음악.

어느 정도 소란스러운 카페에서 좋은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일도 좋아하지만, 다이어리 하나 들고 앉아서 커피 마시면서 다이어리를 정리하는 일과 좋아하는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도 좋아했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만해도, 참 좋아요.


특히, 지금처럼 크리스마스 시즌에 스타벅스와 같은 카페에 가서 뜨거운 커피 한 잔과 재즈 캐롤을 즐기다 오는 일은 정말, 좋았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얼죽아가 되었나,

기억을 더듬어 봅시다.


아무래도 그 시작은 역시 아이를 낳고 부터였던 것 같아요.

신생아를 24시간 케어하는 엄마에게 뜨거운 커피는 사치였죠.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마실 시간도 없거니와 혹시라도 커피가 엎질러진다면 아이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으니까요.

영유아검진을 하러 소아청소년과에 가면 늘 의사는 뜨거운 걸 아이 근처에 두지 말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자연히 늘 차가운 커피와 함께했던 것 같아요.

육아 스트레스를 푸는데,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는데는 커피만한 게 없는데, 아이곁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실 순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그때는 아이스 라떼, 가끔은 즐겼었죠. 그런데 둘째를 낳고나서, 둘째가 우유 알러지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그마저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모유수유를 할 때는 물론 우유가 들어가면 반응을 보여서 어쩔 수 없었지만, 모유수유가 끝나고도 문제가 있더라고요.

아이스 라떼 근처에서 놀던 둘째가 컵을 건드려 얼굴에 몇 방울이 튄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얼굴에 모기 물린 것 처럼 올라오는 알러지 반응을 보고 ‘아, 이젠 라떼도 포기를 해야겠다.’, 고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얼죽아파가 되었습니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커피’에서 조금 더 나아간 ‘얼어 죽어도 아이스아메리카노’로 말이죠.


엄마가 되어간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지금까지 즐겨왔던 여러 가지를 포기하는 일이라는 것도 확실합니다.


처음에는 고3때보다 더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상황을 겪으며, 배고플 때 먹고, 싸고 싶을 때 싸는 일 자체도 어려운 적이 많아서 이 작고 연약한 아기가 사람을 이렇게 구속을 할 수가 있나,하고 너무 억울한 마음도 들었던 것 같아요. 아이에게 가장 사랑을 받긴하지만 가장 힘든 일들이 특히, ‘엄마’에게 한정되는 부분이 많이 있어서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이라고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물론 너무 바래왔고, 사랑하는 아기니까 엄마는 결국 힘든 순간들을 다 이겨내게 되지만요. 그러면서 그렇게 싫다고 괴롭다고 울부짖던 그 ‘엄마’라는 틀에 자연스럽게 갇히게 되더라고요. 아무도 나한테 이렇게 살라고 하지 않았는데, 아기를 위해서 감내하고 포기하다보니까 그냥 이런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면 우리 엄마도 이렇게 엄마가 되었겠지, 라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때도 많더라고요.

당연히 엄마는 내가 부르면 곁에 있어주는 건 줄 알았는데, 배고프다고 하면 밥을 차려주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엄마도 지금의 나처럼 즐겁지만 너무도 힘든 그 엄마라는 길을 무던히도 갈등을 겪으며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거겠죠.


엄마라는 삶이 행복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어렵고, 사랑의 감정에 흠뻑 빠졌다가 괴롭다고 발버둥치기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엄마라는 삶에 갇혀버리는 거죠.


제가 어쩌다보니 얼죽아파가 된 것 처럼 말이예요.


이젠 둘째가 4살이 되어서 덜 조심해도 되는데(물론 우유 알러지는 여전히 조심해야 합니다만) 여전히 아이에게 피해되는 일이 있을까봐 아이랑 함께 있을 때면 늘 얼죽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젠 아무도 저한테 강요를 하지 않는데, 지키고 싶은 아이를 위해 그렇게 선택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엄마가 되어갑니다.


아이가 아프면 다 내탓같고,

며칠이라도 간편하게 만드는 요리들을 먹이면 한 번은 제대로 밥상을 차려줘야 잘 클 것 같고,

채소나 생선, 고기를 골고루 먹여야 할 것 같은 그 굴레가 있습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아직은 빠져나올 수가 없네요.






오랜만에 솥밥을 했습니다.


무쇠솥밥 맛 자체도 참 좋지만, 누른밥에 물을 부어 놓으면 마지막에 뜨끈하게 누룽지도 먹일 수가 있죠.

그런데 이게 설거지와 관리가 좀 귀찮아요.

웬만하면 세제를 쓰지 않아야 하기도 하지만, 물기가 그대로 있으면 녹이 슬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열을 가해 바짝 말려줘야 하거든요.

그래서 밥 먹고 바로 설거지하고 물기를 말려주는 과정을 꼭 해야 합니다.


이게 귀찮아서 가끔 찬장에서 꺼내곤 했는데,

요즘 오랜만에 다시 무쇠솥밥을 하고 있어요.

바쁘다는 핑계로 느슨해졌던 아이의 먹거리에 다시 집중해야겠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거든요.



생각해보면 이 무쇠솥밥이
제가 제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방식인 것 같아요.




어릴 때 배가 아플 때면 엄마가 배를 문질러 주시며 ‘엄마손은 약손’을 해주셨던 기억이 아직도 따뜻하게 남아 있습니다.

‘엄마 배아파.’,라거나 엄마손 해줘’,라고 하면 언제든 내 배로 다가오던 엄마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어요.

같이 누워서 그 기분 좋은 쓰다듬에 집중을 하다보면 어느새 엄마가 먼저 잠들어 손길이 멈췄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또 제가 ‘엄마~’하고 엄마를 부르죠. 그렇게 또 ‘엄마손은 약손~’이 시작되고요.


그 노래를 부르던 엄마의 음성과 손길의 따뜻함도 생생하지만, 엄마가 되고 보니 나는 아직 깨어 있는데, 먼저 잠이 빠지시던 그 시절 엄마의 육아에 대한 그 ‘고단함’에도 공감이 많이 됩니다. 그 때는 ‘뭐야, 나는 깨어 있는데 엄마가 왜 먼저 자.’,와 같은 투정과도 비슷한 생각만 들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엄마도 사랑하고 소중한 아이를 위해

스스로 고단한 엄마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의 제가 그렇듯이 말이예요.


지금은 모든 일에 엄마를 찾는 아이들을 보며, ‘가끔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 ‘도대체 언제 크려나.’,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엄마랑 상관없이 알아서 잘 하는 아이들에게 때론 서운함을 느낄날이 오겠죠.

아이들을 어느정도 키워 홀가분해 보이는 육아선배들이 지금이 귀엽고 좋을 때다, 라고 부러움을 보내는 눈빛들을 받을 때도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 너무도 작고 소중한 생명체를 위해, 잠도 못자고 밥도 제 때 못 먹는 힘든 엄마의 삶을 살다보니 어느새 스스로 엄마라는 틀에 갇히게 되고, 점점 자라나는 아이들을 응원하고 기특해하다가 나중에는 어느정도 서운하거나 외롭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겠죠.


자의반 타의반으로 180도 바뀌어 버린 ‘엄마’라는 삶에 적응을 하고 보면 또 ‘아이의 독립’이라는 가치를 응원해야하는 새로운 엄마의 역할로 다시 변해야 할 겁니다.




그때는 얼죽아에서

계절따라 다양한 온도와 맛의 커피를 즐기는 사람으로,


아이한테 모든 걸 해주려고 하는 엄마에서

한 발자국 뒤에서 응원해주는 엄마로,


정신없이 뛰어가던 삶에서 내려와

주변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으로.


그렇게 살아봐야겠습니다.



우리엄마가 나의 성장에 따라 변화했듯,

저도 그렇게 지혜롭게 살아봐야겠어요.


그게 인생이고,

그게 엄마의 삶이니까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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