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멀미가 너무 심했다.
차를 타게 되면 봉지는 필수품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봉지를 만지작거렸다. 봉지를 만지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뭔가 위안이 된다고 할까? 라이너스의 담요 같은 거였어, 나에게 구토 봉지는 말이지. 일종의 마음대로 토하렴, 이런 심리적 편안함을 주었다.
구토 봉지는 나름 선별작업을 거친다. 내용물이 보이지 않아야 하고 봉지를 챙기기 전에 구멍이 났는지 확인 작업을 거친다. 그러고 나서 나의 구토 봉지로 간택을 받게 되는 것이지, 아무렴.
아,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는데 봉지에 손잡이가 있어야 때에 따라서 양쪽 귀에 봉지를 걸기 용이하다.
삼십 분 이상을 타면 어김없이 구토를 했다. 삼십 분을 넘지 않으면 가벼운 멀미만 하고 구토는 하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야 그 어지러움이 해결되고는 했다.
집에서 시장과 문구점이 버스로 딱 삼십 분 거리였다. 구토는 절대로 피해 갈 수가 없었어.
여름에는 시원하게 창문이라도 열 수 있지만 겨울에는 절대로 창문을 열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그 무거운 버스 공기를 그대로 맡아야 했다. 멀미하는 사람은 안다. 버스 특유의 냄새가 있다. 나에게는 구토를 몰고 오는 냄새였다. 그리고 더 싫은 건 관광버스 냄새. 관광버스는 정말이지 타자마자 무조건 자야 한다. 절대로 깨어 있어서는 안 된다.
버스로 통학을 하게 되는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멀미가 멈추었는데 그럼에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꼭 멀미를 했다. 그게 몸이 적응해서인지 아니면 중학생이 되면서 급격하게 살이 쪄서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릴 때는 몸이 약했던 것 같다.
그네도 어지러워서 오래 못 탔다.
아빠는 그렇게 멀미가 심했어도 친척집에 갈 때에는 나를 꼭 데리고 갔다.
아무래도 쉬지 않고 쫑알거리는 나를 데리고 가면 친척분들이 예뻐해 주셨던 것 같다.
최고의 난이도는 부산 큰아버지댁이었다.
아빠는 가끔 할아버지를 모시고 부산에 가고는 했다. 우리는 기차로 이동했고 아빠와 나는 좌석에 앉아본 적이 없다. 누군가 두고 간 신문을 들고 빈 좌석에 앉아 신문을 보던 아빠를 기억한다. 우리는 항상 입석이었다.
나는 출입문과 최대한 가까운 구석에 자리 잡았다. 아빠가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주면 나는 벽에 기대 잠만 잤다. 멀미가 심해 눈뜨면 토했다. 부산을 가는 날이면 저녁 늦게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계속 토했다.
그날은 부산에 도착했는데 큰아버지 식구들이 모두 어디를 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 밤 할아버지, 아빠, 나 이렇게 여관에서 잤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미 종일 토해 기력도 없었고 머리가 어지러워 거의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새벽녘 눈이 떠졌다. 배가 너무 고팠다. 먹은 것을 다 토했으니 너무 허기가 졌다.
주섬주섬 어두운 방을 더듬으니 무언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딱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거 먹는 거다!
뭔지도 모르고 일단 입에 넣었다. 눈물 날만큼 맛있었다. 혼자 봉지에 든 것을 다 먹었다.
후에 알았다. 그걸 사람들이 ‘오란다’라고 부른다는 것을 말이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지금도 나는 그 오란다를 좋아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오던 길에 팔길래 너 생각나서 사 왔다고 오란다를 들고 왔었다.
아직도 그 새벽녘에 먹던 오란다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방안에 누워 오독오독 오란다를 씹으면 허기를 달래던 그날의 기억을.
컴컴한 여관방에 누워 달달한 오란다는 씹던 그날의 행복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