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장례식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여가 나가는 날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할아버지도 동네 어르신들처럼 꽃상여를 타고 가셨다.
나는 어릴 적 동네 부고를 두 가지로 알았는데 하나는 엄마가 일을 하고 얻어온 기름 냄새나는 전과 상여가 나갈 때 길에 울리는 종소리였다.
까만 봉지에 담긴 고기 완자는 식어도 너무 맛있었고 가난한 우리 집은 명절에도 음식을 하지 않았기에 동네잔치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식이었다.
집 앞에 서 있으면 저만치 꽃상여가 오고 있었다. 앞에 선 상복을 입은 동네 아저씨가 커다란 종을 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구세군이 울리는 종의 크기와 비슷했던 것 같았다.
가사를 알 수 없는 상여소리에 맞추어 천천히 종이 울리면 나는 꽃상여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고는 했다.
동네 사람들은 상여 나가는 날 함박눈이 내린다며 이제 우리 집이 부자가 될 거라고 했다(그때 시기라도 물어봤어야 했다. 그게 언제쯤인지 우리 세대에 적용이 되는 것은 맞는지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을 기억한다.
엄마는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시면 우신다.
할아버지는 눈빛으로 얘기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간다. 잘 살아라.
내가 기억하는 그날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아빠의 말과 함께 커다란 하얀 천으로 할아버지를 덮으셨다.
그러고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에 다 모여 음식을 했다.
잔칫집 앞에 서 있으면 일을 하던 엄마가 와서 내 입에 뜨거운 고기 완자를 입에 넣어주었다.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음식을 하니 기다림이 없다는 사실이 어색하고 이상했다. 그냥 접시에 놓은 것들을 먹으면 되는데 손이 가지를 않더라.
맛이 없더라.
그게 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인지 엄마가 넣어주는 애타는 기다림이 없어서인지 나는 모르겠다.
장례기간이 끝나고도 며칠은 집에 음식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족이 많으니 음식은 금방 바닥이 나지만 워낙 양이 많았던지라 며칠은 배불리 먹었다.
둘째 언니가 가장 많이 울었다.
언니는 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언니는 아빠가 돈을 잃어버려 소풍에 빈 손으로 갈 때 할아버지께 돈을 빌려 달라고 한 적이 있다.
아빠가 갚을 리 없다면서 할아버지는 끝까지 돈을 주지 않았다. 언니는 울면서 학교를 갔다. 그리고 언니에게 그날은 최악의 소풍날이 되었다.
나 역시 할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은 별로 없다. 사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껴본 기억이 없다. 커서 돈 벌면 할아버지 용돈 줘야 한다고 어린 우리에게 당부하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내가 너 국민학교 들어갈 때까지 살려나?"
"내가 너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려나?"
큰언니 입학 전부터 그 얘기를 하셨다고 하는데 할아버지는 막내 동생 입학까지 모두 보셨다(큰언니와 막내는 열 살 터울이다). 막내 초등학교 졸업을 제외하고는 네 자매의 졸업까지도 다 보신 셈이다.
할아버지 방은 언제나 이불이 펴져 있었고 방에는 항상 오강이 있었다. 문을 열면 찌든 담배 냄새와 언제 비웠는지 모를 오강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는 항상 화투 짝을 맞추고 계셨다. 경로당에서 먹다 남은 과자를 우리에게 주면 담배 냄새 진득하게 베인 그 과자를 잘도 먹었던 기억이 있다(할아버지 점퍼 안 주머니에서 먹다 남은 과자가 나왔고 할아버지의 담배도 항상 거기서 나왔다).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둘째 언니가 가장 많이 울었다. 나는 설거지하다 한 번 울고 그게 전부였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는 밤이 되면 엄마를 불렀다. 서럽게 엄마를 찾다가 아빠가 오면 좀 잠잠해지고는 했다.
그때 알았다. 아, 할아버지도 엄마가 있었구나. 할아버지도 처음부터 할아버지는 아닌데 엄마를 찾는 할아버지가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난 사실 노인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노인이 되면 할아버지처럼 되는가 싶어 몸서리 쳐지게 싫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참 이기적으로 보였거든, 그래서 나는 노인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결국 나도 노인이 된다. 할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어떤 노인이 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나는 잘 늙고 싶다.
잘 늙고 싶은데 그 ‘잘’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실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잘 늙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