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리한 호구 Jan 28. 2023

내 길을 밝혀주는 건..

가평에 놀러가 저녁에 호명호수에 걸어 올라갔다가 해가 져서야 내려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눈이 온 후였고, 차도 다니지 않는 도로위의 눈을 길 가로 치워 놓은 상태였습니다. 치워 놓은지 조금 되었던 듯 까무잡잡한 때가 좀 있는 그냥 그런 눈들 이었습니다. 갓 내린 하얀 눈, 순수한 눈과는 거리가 멀었고 말그대로 '치워 놓은 눈'이었죠. 올라가는 길에 별 다른 눈길조차 닿지 않는 그냥 눈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상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던 겁니다. 내려가는데 다시 1시간이 걸릴텐데..벌써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졌으니 칠흑같은 어둠에 사람도 다니지 않는, 가로등 하나 없는 길에서 조난이라도 당하는 건 아닐지 엄청나게 걱정을 하면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어두워 지면 산길이라 꼬불꼬불한데 모르고 앞으로 가다가 떨어지는 건 아닐지 걱정했죠.


그런데 날이 어두워 질 수록 길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올라올 때 봤던 길 양옆으로 치워 두었던 그 눈들 이었습니다. 꾀죄죄해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그 '치워놓은 눈'들이 밤이되어 다른 빛들이 없어지니 그 얼마 없는 빛들을 반사해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둠에 적응된 제 눈에는 그 하얀 띠가 굉장히 밝게 보였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평소 별 생각 없이 대했던 그 눈들이 제 어둠속에서 길을 잘못들지 않게 가이드라인을 만들에 제 길을 밝혀주고 있었죠. 저는 유일한 빛이라고 생각했던 해가 지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제대로 된 길을 걸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해가 지더라도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제 앞길을 밝혀주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에 기대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나 연인일수도 있으며 내 재산, 건강, 직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없이는 내가 앞으로 제대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죠.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그것으로부터 떨어져야만 하는 일들이 생기죠. 연인과 헤어진다거나 부모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낸다거나, 믿었던 친구와 절교를 하거나 하는 경우부터, 내 자랑인 재산이나 건강을 잃거나 내가 쌓아 올린 커리어가 단절되거나 정리해고로 자랑스러운 직업을 잃게 되거나..하는 많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세상이 무너지는 상실감을 느낍니다. 내가 유일한 빛이라고 생각하고 의지했던 그 대상이 내 삶에서 없어지면 당연히 내 앞길은 한치앞도 보이지 않을 것이고, 나는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라 겁먹으며 주저앉아 버리게 되죠. 하지만 살다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산길을 내려오면서 유일한 빛이라 생각했던 해가 져서 걱정을 했지만 보잘것 없던 '치워진 눈'이 제 앞길을 이끌어 주었듯이요, 우리의 인생에서 유일한 빛이라 생각하는 존재가 사라지더라도, 내가 평소에 눈여겨 보지 않고 오히려 무시했던 어떤 것이 새롭게 나타나 나의 길을 이끌어 줄 수 있다는 것이죠.


지금 큰 상실감을 가지고 있나요? 내 인생에서 유일한 빛이 사라진 경험중에 있나요? 힘을 내서 이겨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전혀 도움이 안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 시기에는 원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니다. 심지어 일어설 힘도 가질 수 없는 것이 그 시기에요. 그러니 주저앉아 울고만 있는 자기를 약하다고 탓하지 마세요. 지금 일어나지 못하는 건 우리가 약하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사람이라 그런겁니다.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요, 큰 빛이 사라졌다고 해서 세상이 암흑천지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어두워 질 때야 비로소 보이는 별빛들, 반딧불이, 저 멀리 보이는 간판들, 길가에 치워진 눈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우리의 길을 밝혀주고 있어요. 평소엔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것들의 도움을 느끼게 되죠.


 그러니까요. 지금 너무나 큰 상실감에 빠진 우리, 무리는 하지 말고 살짝 눈만 들어서 혹시 이제서야 보이는 작은 빛들이 있지는 않은지 살짝 찾아보세요. 연인에 가려져 조금은 소흘했던 친구들이라던지, 직장과는 별개로 해왔던 나의 작은 취미와 같은 그 작은 빛들을 찾아보고 내 앞길이 한치앞도 안보일만큼 어둡지는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주저앉은 김에 푹 쉬고 조금 힘이 났을 때 그런 작은 빛들을 찾아가며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화이팅입니다~!!


이전 05화 당신은 '정말로' 겸손한 사람인가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