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은 회사 이벤트가 준 기회
“추수 감사절 전까지 Fall Fan Days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일부 직원들이 이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전체 회의가 있는 날 자신이 좋아하는 것, 팬을 자처하는 것들을 상징하는 그래픽이나 로고가 있는 티셔츠를 입고 참석해 주세요. 화상으로 참여하시는 분들도 비디오 켜고 자랑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내일모레부터 시작입니다.”
나는 왜 이른 시각, 회사 이메일을 열어봤는가. 웬만해서는 오전 9시 전까지는 회사 이메일을 체크하지 않지만 오늘 아침까지는 급히 받아야 하는 업체 이메일이 있기에 들어가 본 것이 화근이었다.
보자마자 드는 생각.
일 하기도 바쁜데 정말 가지가지한다.
가뜩이나 요즘 ‘심플라이프’ 지향으로 자주 입지 않은 옷들을 계속적으로 정리하고 주변에 나눠주고 있는 판에 그런 티셔츠가 있을 리 만무하다. 게다가 본래 깔끔한 단색상의 옷을 입고, 패턴보다는 심플하거나 약간의 디자인적인 변화를 주는 옷들을 좋아하기에 옷에 복잡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냥 당당히 없다 해. 3일 전에 알려줬는데 회사도 할 말없지. 난 그런 회사 이벤트 젤 싫음.”
이런 이벤트 (특히 회사 관계해서)를 극혐 하는 남편은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역시나 ‘배 째라’ 답변이다. 아마 그 라면 정말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그런 배짱이 없다. 게다가 그 의도가 좋은 건 사실이니까. 일하기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소소한 이벤트를 만들어 직원 간의 웃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서로의 소셜라이징을 갖으라는 ‘순수한 목적’이 있으니 참여하는 것이 맞긴 하다.
갑자기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의 내가 생각난다. 이런 이벤트를 좋아하다 못해 팀장에게 열심히 제안까지 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때의 나라면 벌써부터 이를 핑곗거리로 울루랄라 쇼핑창을 열었으리라. 갑자기 많은 시간을 훌쩍 건너뛴 지금의 내 마음은 너무 삭막해져 버린 게 아닌가 싶다.
그래, 우선 걷고 보자.
일하기 전 갖는 30분간의 동네 산책 시간. 나만의 아지트 공간에 있는 돌돌이 (큰 길가 작은 샛길 속에 숲 속에 안착된 돌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오늘 가을 아침의 모든 소리들을 귀에 담아본다. 훅하니 뺨을 스치는 바람에 눈을 떠 나무들 사이의 파란 하늘을 올려 보는 순간, 눈앞에 갑자기 하나 둘 눈앞에 보이는 하얀 깃털.
뭐지?
새들이 날아오른 것 같지 않다. 알고 보니 돌돌이 옆, 한 뼘의 작은 공간 안에 피어난 민들레들로부터 날라 올라온 홀씨였다.
모든 꽃들을 좋아하지만 산책을 하면서 자주 보는 민들레에게 많은 정을 가지고 있다. 봄부터 여름까지 만개하더니 어느덧 가을맞이 홀씨를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넓은 잔디밭이건, 아스팔트의 작은 틈이건 여기저기서 보이는 민들레야말로 나의 산책 단짝 친구다. 봄 여름에는 그들만의 산뜻함으로 마음을 즐겁게 해 주다가, 때로는 어디서든 피어나는 그들의 ‘불굴의 의지’로 나를 동기부여 시키곤 한다. 가을에는 홀연히 날려버리는 홀씨로 보는 나 또한 큰 한숨과 함께 마음속 생각들을 날려 보내게 해 주니 소중한 조력자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좋아하는 차 또한 카모마일과 민들레차 아닌가. 요란스러운 덕후까지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민들레 팬’ 아닌가?
조금 일찍 돌아와 아마존 쇼핑창을 열어 급히 열어 빠른 배달이 가능한 ‘민들레 그림 티셔츠’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민들레 홀씨 그림의 티셔츠 발견. 앞으로는 산책 때 입고 다닐 생각에 신이 난다.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민들레 사랑’을 일깨워 준 회사의 가을 이벤트. 불과 30분 만에 '너무 귀찮았던 일'이 '신나는 기회'로 바뀔 줄이야. 이번 주 회의에서 민들레의 매력을 열심히 설명해, 팬을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해 보리, 갑자기 열정까지 불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