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에서 시작된 삶 23
핫핑크로 전체를 칠한 대문. 며칠 전, 새로운 한국 친구와 점심을 함께한 그 장소다. 오늘은 혼자서 비건 카페 <OSANA>를 찾았다. 가족 중심의 웰니스 센터로 요가와 필라테스, 자연요법 등을 아우르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건강한 요리를 판매하는 이곳을 이번엔 혼자 탐방해 또 한 번 누려보고 싶었다.
오전 아홉 시 반, 우버 요금 59파운드를 결제하고 '오사나'에 도착했다. 핑크 대문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야자수와 이름 모를 키 큰 나무들이 대문에서부터 식당 입구까지 길가를 가득 메운다. 식물원에 들어선 듯, 공기마저 싱그럽다. 카페 오른편 작은 길, 그 끝에는 대형 미끄럼틀. 아침 시원한 시간대라 그런지, 서너 살 되어 보이는 금발 아이들이 모래를 맨발로 밟고 손으로 움켜쥐며 놀고 있다. 그 곁에 놓인 의자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엄마들.
아이들 손 잡고 놀이터에 나가 엄마들과 어울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네 옆, 미끄럼틀 아래에서 팔짱 끼고 수다 떨던 한국에서의 시간. 맞아, 쌍둥이 아들 덕에 친해졌던 승재 엄마, 민준 엄마. 그리고… 누구더라, 키 크고 야무진 여자 아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꽤 오래전 일이다. 세 아이를 키우다 보니 주변에 친구 엄마들이 많았다. 함께 축구교실을 다니고, 간식을 준비해 탄천에서 인라인을 배웠다. 아이들 수업이었지만, 결국 엄마들까지 인라인을 구입해 함께 배웠다. 하민이, 하경이 엄마 그리고 늘 앞장서서 뭔가 하자고 했던 모델처럼 키가 컸던 승민이 엄마도 있었지.
놀이터 옆에서 시작해 길게 놓인 4인용, 8인용 테이블들. 수령이 제법 된 나무들이 드리운 그늘 아래, 하얀 차양 우산들이 햇살을 완벽하게 막아준다. 그 끝에 가장 그늘이 짙은 빈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 한 테이블엔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선생님과 앉았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작은 인형과 소품을 이용해 무언가를 설명하던 중년의 금발 커트머리 여성.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손을 들어 웃으며 인사한다.
“Hi.”
나도 활짝 웃으며 인사하고 그 옆을 지나쳤다.
‘무슨 수업일까? 궁금하다 궁금해.’
내가 눈으로 찜해둔 테이블 건너편엔 일곱,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셋.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금발의 여자 선생님. 아이들은 가벼운 샌드위치를 먹으며 선생님과 대화를 이어간다. 그저 일상을 묻는 질문에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얘기한다. 선생님은 잘 들어주고, 반응할 뿐이다. 그중 남매의 티격태격에도 적절히 교통정리하며 세 아이 모두 돌아가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한다. 아이들 목소리는 최고로 신이 나서 지저귀는 종달새 같다. 나는 옆자리에 비켜 앉아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지만, 귀는 아이들을 향해 쫑긋. 미소가 새어 나오는 걸 억지로 참는다. 안 듣는 척, 일하는 척.
기다란 몸통과 다리를 가진 진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식사를 마친 테이블로 성큼 다가가더니 의자 위로 올라선다. 주위를 빠르게 살핀 뒤, 앞발과 고개를 테이블에 얹고는 가뿐히 뛰어올랐다. 잠시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무심히 시선을 돌린다.
'얘, 여기 지켜보는 사람 있거든~'
처음엔 작은 치즈 한 조각만 물고 내려갔다.
다음엔 빵조각 하나. 이젠 아예 테이블 위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겨울날 한국에서 목에 두르던 가느다란 털목도리처럼 생긴 고양이의 긴 꼬리. 테이블 모서리 아래로 툭하니 떨어뜨린다.
고양이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네 개의 둥근돌 접시에 앞발을 담근 채 순서대로 해치운다.
‘하, 이 녀석. 편식도 하네.’
식빵 양면을 벌려 치즈부터 먹는다. 테두리는 얌전히 찢어서 남겨두고. 고개를 빵 속에 푹 박고, 이젠 나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내가 다 보고 있어’
중간에 카페 직원이 테이블을 정리하러 오긴 했지만, 쓰레기만 치우고 음식은 그대로 두고 간다. 혹시 이런 식으로 동물과 상생하는 건가? 잔반 처리반을 따로 둔 건지도 모르겠다.
잠시 후, 윤기 흐르는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식사에 동참할 줄 알았건만, 작은 녀석은 의자에 한참을 서서 큰 고양이의 식사만 구경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 모델 같은 뒤태와 걸음으로 총총 사라진다. 그들만의 소리 없는 규칙이 있는 게 분명해.
테이블 위에서 분홍빛 혀를 날름거리며 입을 닦는 고양이. 귀퉁이에 버티듯 서서 ‘맛있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의자를 밟아 돌바닥에 조용히 착지한 뒤, 철장 아래로 스며든 호스 물을 할짝인다.
“덜커덕, 덜커덕.”
낡은 철제 기구를 밟고 지나 화분 옆에 자리를 잡고 손발을 핥으며 단장을 시작한다. 한참 동안 미세한 근육이 움직이는 뒷모습만 보여준다.
‘아, 덥다.’
아이들과 고양이의 식사를 지켜보느라 50분이 흘렀다. 바깥은 어느새 뜨겁게 달아오른다. 아직까지 미지근한 커피. 시원한 실내로 들어가야겠다. 오늘도 40도를 웃도는 7월 한여름의 이집트. 그늘 아래 가만히 앉아 있으니, 선풍기 1단 바람처럼 간간이 시원한 미풍이 얼굴을 스친다.
‘한국의 습한 여름보단 낫다’는 남편의 위로의 말, 조금은 공감이 된다.
멀리 50미터쯤 떨어진 야외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는 아가와 엄마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마미~”
놀이터에서 엄마를 부르는 아기고양이 같은 꼬마들의 목소리. 멀리서 들으니, “엄마”라고 부르는 한국말 같다.
가끔 아가들과 예쁜 고양이가 보고 싶을 때 이곳을 찾을 테다. 초록 생명으로 가득한 이곳엔 아기도 있고, 엄마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꽃도 있다. 생명력이 꿈틀대는 이 공간에서, ‘살아 있다’는 순풍 같은 기쁨을 나눠 받고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