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에서 시작된 삶 21
“지나, 국제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물론이죠.”
헬리오폴리스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우리를 태워준 이집트 미디어 사업가는 학교 이야기를 꺼냈다. 선뜻 대답했지만, 마음 한 편에 ‘한국어 교원 자격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의 아내는 미국인인데, 딸은 한국 문화와 음식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자격증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안한 표정으로 뒤에 앉은 나를 돌아보는 남편. 몇 번이나 시도했던 나를 막았던 그이다. 자동차 앞 좌석에서는 여전히 대화가 이어졌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묻는다면, 주저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이번엔 반드시 준비하자.’
집에 도착하자마자 검색창을 열었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세워야 할 우선순위를 생각했다. 다시 그려야 할 인생의 이정표가 무엇인지 곱씹었다. 덥고, 외롭고, 불편하다며 투덜거릴 시간이 아니다.
나를 반짝이는 보석으로 발견해 준 이집트인의 호의가 몇 번이고 감사했다. 어쩌면 가족끼리는 너무나 익숙해져서 장점과 귀함을 간과하나 보다. 때론 나만 못 보고 놓치는 남편과 자녀의 특별한 부분. 아쉽고 미안해진다.
다음 날, 남편은 자격증과 관련한 링크를 여러 개 보내주었다. 말없이 건네는 응원 같았다. 준비하지 못한 책임은 결국 내 몫이라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가족과 이주를 결심하던 때에도 딸은 이미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언급했었다. 그때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면 어땠을까.
돌이켜보면 기회는 여러 번 내 앞에 있었다. 4년 전에도, 부산대 한국어 교원 과정 모집 공고를 보며 남편의 의견을 물었던 기억이 난다. 몽골인 대학생들을 돕던 시절, 봉사를 위해 배우고 싶었지만 비용과 현실을 이유로 내려놓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만큼은 고집을 부렸어야 했다.
더 오래된 기억도 있다. 14년 전, 영어 뮤지컬 교육과정 마지막 날에 동료가 내게 한 말.
'서울대 한국어 교원 과정을 신청했다'라고 정보를 주었는데 나는 그저 흘려들었다. 흐름을 읽고 기회를 붙잡는 눈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내 인생 궤적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흘러가는 기회들에 손을 뻗어 잡아야 내 것이 된다. 기회를 볼 줄 아는 눈과 힘도 연습해야 하는 것.
지금 나는 달라졌다. 다시 시간을 들여 언어를 배우고 내일을 준비한다. 인생 후반이 어떻게 열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새롭게 열린 길을 놓치지 않을 테다.
이 길을 비춰준 이집트인에게, 아낌없이 응원해 주는 남편에게, 그리고 다시 도전할 용기를 낸 나 자신에게도 고마움을 보낸다.
늦었지만, 나는 지금 기회를 알아보는 눈과 그것을 붙잡는 힘을 훈련하는 중이다. 기회는 멀리서 오는 듯 보이지만, 늘 곁에서 문을 두드린다. 망설임에 선물 같은 순간을 놓친 날도 많다. 그래도 매번 시작에 늦은 때란 없다.
누군가의 시선과 응원이 때로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오늘 나는, 다시 배우고 준비하면서 삶의 지도를 그린다. 머나먼 이곳 아프리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