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책상 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정우의 키보드 소리와 어우러져 꼭 화음을 넣는 것 같았다. 원래 같으면 시끄럽다고 한 소리 했을 정은은 가만히 두 사람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잠시 이어진 음들은 비어진 한 자리에 머물렀다 흩어지는 듯했다.
그들만의 조촐한 회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주는 작업실을 나갔다. 어느 유명한 드라마 작가의 보조 작가로 들어가게 됐다고 했다.
“여기 계신 분들이랑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꼭 들어가고 싶던 자리라 행복하게 갈게요.”
서주만의 그 특유한 쿨함과 그 속에 숨겨진 따듯한 마음이 그 한 문장에 모두 담겨 있는 듯했다. 정말 짧은 작별 인사만 하고 서주는 그의 길을 떠났다.
“비도 오고, 서주 자리도 비어 있으니 뭔가 가슴이 휑 하네요.”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린이 말하자 정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나가고 이렇게 허전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서주는 잘 있겠죠?”
정은의 의외의 반응에 아린은 손을 풀고 정은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거기 들어가서 작업하면 연락하기가 힘들다고 했는데. 흠. 다른 작가님이 또 들어오시려나?”
“서주 같은 사람이면 좋겠는데. 우리 또 회식도 하고.”
회식이라는 말을 하며 정은의 눈길이 잠시 정우에게 머물렀다는 건 아린만 알고 있었다.
“오는 사람도 있고 가는 사람도 있고.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참, 그건 그렇고 아린 선배는 도쿄에 대해 다 알아봤어요?”
도쿄라는 말에 아린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부터 점심시간이 되면 다 같이 식사를 한 후 정우와 옥상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며 쉬다 오곤 했다. 서로 좋아하는 작가와 글의 소재등을 공유하기도 하고 아무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때 일본 문학을 좋아하는 아린은 도쿄에 가고 싶다는 말을 정우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가고 싶으면 가봐야죠. 선배 생각보다 경비가 많이 들지 않아요. 3박 4일 안에 모든 곳을 둘러볼 수는 없지만 그곳을 느끼기에는 충분하거든요. 해봐야지 해봐야지 하면 결국 못해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저질러야 할 수 있거든요.”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본 적 없는 아린이었기에 가까운 나라지만 멀게 느껴졌다. 사실, 가고 싶다는 말에 숨겨진 아린의 두려움을 정우가 꿰뚫어 본 것 같았다. 가고는 싶지만 겁이 난다, 가고는 싶지만 두렵다. 이게 아린의 본심이었다.
너튜브 여행을 제안한 것도 정우였고 도쿄 여행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것도 정우였다.
이미 여러 번 일본을 다녀왔다는 정우는 아린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기차를 타는 것부터 꼭 가봐야 할 곳까지. 아직 너튜브만 보고 있지만 정우와 대화를 하다 보면 이미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고는 있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직접 가봐야 알 것 같아요. 이 나이에 첫 해외여행인데 길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철저히 알아봐야 하는데 생각보다 어렵네요. “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요. 한국어 안내도 잘 되어 있고.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인데. 여름엔 가기 힘들어요. 덥고 습해서. 저질러요. 일단 비행기 티켓을 먼저 끊고, 숙소를 알아보고, 그 주위를 찾아봐요. “
아린은 속으로 말이야 쉽지,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정우 씨가 보내 준 너튜브에는 제가 원하는 그림은 보이지 않았어요.”
정우는 어떤 그림이냐고 물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음.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 일본 소설은 굉장히 서정적이거든요. 일본 소설을 읽다 보면 그 길을 내가 직접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들어요. 억지로 꾸며내지 않고 소박하고 단정한 느낌? 그런데 도쿄 여행의 너튜브들은 대부분 바쁘고 북적이고, 번쩍번쩍해요. 소설 속의 그 길들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감성을 느끼고 싶었거든요. 가끔 시골길을 걷는 것도 나오지만 그것도 생각했던 거랑 다르더라고요.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일단 가보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도쿄도 서울처럼 북적이고 사람도 많지만 느낌이 달라요. 뭐랄까, 아주 분주한데 조용하달까.”
분주한데 조용하다고? 아린은 그런 도쿄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정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일본 소설이에요? 우리나라 문학은 별로라는 건가? 우리나라 소설?”
정우와 아린의 대화에 소외감을 느낀 걸까, 정은은 조금 날카라운 톤으로 아린에게 물었다. 아린은 몸을 틀어 정은을 향해 앉았다.
평소 같으면 정은의 튀는 말에 아린은 맞받아 치지 않거나 차분히 대응했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입이 근질거렸다.
“우리나라 소설도 정말 좋아해요. 한국사람들이 가장 공감하는 정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정말 대단한 문장력들을 가지고 있어요. 부러울 만큼요. 그런데 조금 어렵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다. 그건 제가 이해력이 부족한 탓일 거예요. 모든 작품이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음. 일본 소설은 톤이 단조로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니 오해는 말아요. 물론 번역을 했기 때문에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지만 가독성이 굉장히 좋아요. 단조롭고, 서정적이고, 소박해요. 그렇다고 시시하거나 심심하지 않고 소설 속으로 절 끌어들이죠. 어느 순간 제가 주인공이 되어 있는 듯해요. 화려한 말, 어려운 문장으로 글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읽어주는 책과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비교하자면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같거든요. 저랑 잘 맞는 거죠. 그헣다고 모든 일본 소설이 또 그런 건 아니겠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에 한해서라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네요.”
평소에 이렇게 긴 문장으로 말한 적이 없는 아린이었기에 정은은 딱히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한국 소설보다 일본 소설을 좋아한다는 말이 한국에서 웹소설과 소설을 쓰고 있는 정은과 정우 두 사람에겐 기분 나쁜 말로 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들을 무시하거나 다른 나라 문학을 더 위대하게 생각한 건 절대 아니었으니까.
아린이 좋아하는 작가 특유의 문장들을 사랑할 뿐이었다.
“우리나라 소설도 그런 거 많잖아요.”
잠시 뜸을 들이던 정은이 한 말이었다.
“맞아요. 그래서 조금 전에 우리나라 소설도 정말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열 번을 넘게 읽은 소설들도 있어요. 그분들의 글을 읽으며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책도 많구요. 그 소설들 속 배경 지역은 대부분 다 찾아가 봤어요. 여기서 이랬겠다, 이 신에서는 이랬지 하면서요. 그런데 일본은 아직 한 번도 못 가봐서 가보고 싶다고 한 거… 예요.”
차분히 설명하던 아린은 갑자기 왜 이렇게 구구절절이 변명하듯 대답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끝 말을 흩트렸다. 아린의 끝말에 정은도 더 이상 날카로운 말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랬구나. 제가 오해했네요.”’
도대체 무슨 오해를 한 걸까. 아린도 정은과 같이 뼈를 담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삼키기로 했다.
작업실의 찬 기운을 감지한 정우는 커피 머신 앞으로 다가갔다. 세 개의 잔에 차례로 아메리카노를 내렸다.
“정은 씨는 아이스. 아린 선배는 찬물 조금 섞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맞죠?”
“네. 감사해요.”
정은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키보드를 두들겼다.
정우는 아린과 정은 책상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가워진 공기를 따뜻하게 바꾸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아린은 다시 창 밖을 응시했다. 도쿄. 책에서 봤던 그 배경들은 정말 있는 걸까.
정은과의 대화가 불쏘시개가 된 건지 아린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래, 저질러 그냥.‘
아린은 노트북을 다급히 두드리며 일본행 티켓을 예매했다. 아린의 키보드 소리에 뭔가 느낀 건지 정우가 아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배 혹시 예매했어요?”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린의 자리로 다가왔다. 아린은 어쩜 저렇게 촉이 좋을까 싶어 정우를 바라보다 곧바로 정은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가 다가오는 걸 보곤 정은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아린은 꼭 삼각관계의 중심에 있는 듯해 불편했다.
정우가 고개를 숙여 아린의 노트북을 보려 하자 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다음 주로 예매했어요. 진작 그냥 지를걸 그랬네요. 이제 숙소도 알아보고 빨리 다녀와야겠어요.”
“도쿄네요. 5박 6일? 3박 4일이 아니고? “
“네. 여유 있을 때 다녀오는 게 좋다면서요. 공항에서 또 도쿄까지 가는 시간도 있으니 하루는 버리는 거라고. 그래서 이번엔 도쿄로 다녀오고 다음에 후쿠오카나 오키나와 쪽으로 가보려고요. 저 잠시 옥상에 좀 다녀올게요. “
아린은 불편한 공기의 작업실을 빨리 나오고 싶었다.
옥상에 올라온 아린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호텔을 예약할 수 있는 어플을 눌렀다. 생각보다 가성비가 좋고 후기가 괜찮은 호텔들이 줄지어 나왔다. 어느 지역에 정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신주쿠로 해요.”
갑작스러운 음성에 아린은 깜짝 놀라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어휴. 놀래라. 언제 올라왔어요?”
“방금. 와도 모르던데요?”
“정은 씨는 어쩌고 왔어요?”
“네?”
정우는 당황했다. 아린도 당황하는 정우를 보고는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아니 아니. 왜 나왔어요?”
“숙소 정할 때 팁 좀 드리려고 했죠. 가부키초 쪽 말고 지하철 역이랑 가까운 곳으로. 여기 보시면 제가 전에 묵었던 곳인데…“
정우는 폰으로 자신이 묵었던 곳이라며 호텔을 보여주었다. 호텔 몇 군데를 가봤지만 이곳이 가장 좋았다며 호텔 이름과 위치도 알려주었다. 아린은 정우가 알려준 곳을 어플에 입력했다. 다행히 아린이 가려는 날에 예약이 가능했다.
정우는 세심했다. 그의 친절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이 불편함의 원인이 정은인지, 아님 아린 자신의 닫혀있는 마음인지 알지 못했다.
아린과 정우는 잠시 대화를 나누다 작업실로 내려왔다. 그런데 정은이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도 꺼놓고 간 거 보면 집으로 갔거나 외출을 한 모양이었다.
‘아까 너무 차갑게 말해서 가버렸나. 에이 아니겠지.‘
아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 후 아린이 도쿄로 떠나는 날까지 정은은 보이지 않았다. 톡을 남겨 봐도 답이 없었다. 하울의 말로는 며칠 작업실을 오지 못할 거란 말을 전했다고 했다. 아린의 마음은 내내 불편했다. 정말 자신 때문에 작업실을 나가버린 걸까.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 전 폰을 끄려는 순간, 정은에게서 톡이 도착했다.
[언니, 조심히 잘 다녀오시고 도쿄 바나나빵 꼭 사 오세요! 시골이라 폰이 안 터져서 이제야 봤어요. 긴 얘긴 돌아오면 해요!]
갑자기 시골이라니. 정은에게 사연이 있었던 걸까.
아린은 뭐야, 하면서도 안도했다.
폰 종료 버튼을 누른 아린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늘 잡생각과 오만 상상으로 가득 차있던 머릿속이 오랜만에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