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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Sep 10. 2024

6.준비는 피아니시모(pp), 시작은 포르티시모(ff)

정우는 준비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어떻냐고 했다. 

사람을 관찰하고 몇 군데 투고를 해보고, 작은 공모전에 당선되어 본 이 경험들을 말이다.

“경험이라는 게 참 중요해요. 해봤다 못해 봤다의 차이가 참 크거든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처럼요. 모르는 건 배우게 되면 아는 것이 되고 못해본 건 해봄으로써 해봤다가 되잖아요.”

정우의 필력에, 아니 언어력에 아린은 새삼 감탄스러웠다.

“그러니 지금까지는 아주 잔잔히 여리게 준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출발선에서 어슬렁거리며 스트레칭을 했다고.”

정우의 말은 정말 귀에 쏙쏙 들어왔다. 재능이 없어,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어라고 생각하고 있던 아린은 정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칩처럼 몸에 꽂히는 것 같았다. 

“스트레칭이 끝났으니 출발해야겠죠. 그럼 난 어느 레인에 서서 달려야 할까요? “

“그건 선배님 마음이죠. 플랫폼에 연재를 해도 좋고, 완결을 내서 다시 투고해도 좋고요. 혹시 지금 쓰고 계신 소설의 소재를 여쭤봐도 될까요?”

“음. 그냥 일상이야기예요. 그런데 저는 항상 이야기가 맴돌아요. 로맨스도 아니고, 추리도 아니고. 일상적인 이야기. 임팩트가 없죠.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요. 아까 정우 씨가 말할 때 아차 했거든요. 맞아, 나 경험 부족하지. 이 나이 되도록 아직 해외여행도 한 번 못 가봤고, 대한민국 곳곳을 둘러보지도 못했어요. 다른 이들의 글을 많이 읽어보지도 못한 것 같고. 그러니 글의 배경과 소재 선택의 폭이 좁죠.”

“그럼 해결 됐네요. 여행부터 다녀보세요. 여의치 않으면 세계 곳곳의 모습을 담은 유튜브도 좋고, 책도 좋고. 직접 해보면 가장 좋겠지만 간접 경험도 나쁘지 않거든요. 책이랑 영상으로 여행을 가는 거죠. 그리고 선배님이 그곳에 있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글의 소재가 더 빵빵해질걸요. 사람들 관찰하는 것처럼 그곳에 내가 있다면 나는 어떤 모습일지를 영상을 보며 메모해 보는 것도 좋아요. 글을 쓰는 걸 보지 말고 눈은 영상에 손가락만 키보드에. 오타도 많이 날 거고 무슨 말인지 모를 때도 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소재가 그 속에 담겨 있어요. 보물 창고가 되는 거죠. 그리고 로맨스, 추리 이렇게 장르를 딱 정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일상적인 소재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 로맨스가 있을 수도 추리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

아린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콕콕 짚어 주었다. 그 이야기 안에는 정우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린의 뼈를 때리는 말들이 있었다. 장르를 정하고 쓰지 말라는 말. 하지만 보통 글을 배울 때 장르를 정하고 그 안에 캐릭터를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그는 그런 일반적인 틀을 깨라고 했다. 그의 말이 맞는 걸까, 자신이 배운 것들이 맞는 걸까 아린은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장르를 정하지 않고 글을 쓰면 산으로 가지 않을까요. 장르를 정하고 이야기의 큰 틀을 정한 뒤에 캐릭터를 뽑아내야 하니까.”

“반대로 캐릭터를 먼저 만들고 그의 성격에 맞는 이야기들의 틀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만약 선배님이 사람들을 관찰하다 어느 한 캐릭터가 머리에 떠올랐어요. 그 사람의 성격에 대해 상상하다 보면 그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이야기 속에 있을까가 떠오르지 않아요? 그 방향도 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반박할 만한 말은 없으니까. 

“선배,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부드럽게 준비해요. 아주 천천히 여리게. 그리고 시작하게 되면 벼락이 칠 거예요. 머리에서. 베토벤의 운명처럼. 따다 다단! 내 말을 믿어봐요. “

베토벤의 운명처럼. 아주 천천히 여리게. 아린은 정우의 말을 곱씹었다. 정우는 아린에게 자신감을 꽂아 주었다가 또 고정관념에 박혀 있는 아린의 머릿속을 해 집어 틀을 깨 주고 있었다. 그의 의도대로 아린이 숨어있던 작은 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제부터 반복된 이야기로 피로감을 느낄 만도 한데 정우는 처음 듣는 것처럼 진지하게 아린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정우 씨랑 대화를 하다 보면 마음속에 숨어 있던 굉장히 고리타분하고 소심한 자아가 도망간 기분이에요. 술이 다 깨네. 후. 정우 씨 졸리지 않아요? “

손을 앞으로 쭉 뻗은 후 아린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정우는 괜찮다며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


눈을 뜬 아린은 깜짝 놀랐다. 수면실 간이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자각하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언제 내려왔는지, 어떻게 내려왔는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정우와 대화 중이었다. 아니 대화가 끝난 후 동이 트는 걸 함께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의 상황은 모두 날아가버렸다. 마지막 정우와 대화했던 모든 내용은 기억이 나지만 딱 그 후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에 취했던 걸까. 

‘하긴, 취하긴 취했지. 근데 왜 대화내용은 다 기억나는데 여기 온 것만 기억이 안 나? 담배도 피우고 있었는데?’

아린은 주위를 둘러봤다. 먼저 잠들었던 서주와 정은은 보이지 않았다. 급히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베개 밑에 놓여 있는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하자 오후 12시를 갓 지나고 있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고 핸드폰 카메라로 자신의 얼굴을 대충 확인한 후 아린은 수면실을 나왔다. 정은은 분주하게 글을 쓰고 있었고 서주는 영상을 보는지 이어폰을 꽂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정우는 보이지 않았다.

“다들 먼저 일어났네요. 괜찮아요?”

손을 멈추지 않은 정은이 아린을 바라보았다. 

“일어나셨어요? 언니 어제 더 드신 거예요? 우리는 그래도 11시 좀 넘어서 일어났는데 언니 깨워도 못 일어나시더라고요.”

“그래요? 

아린은 깊은 잠이 든 적이 없다. 글을 쓰기로 한 후부터. 꿈에서 허우적거리거나,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요란한 꿈속을 헤매다 깨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술을 마셨다고 해도 이렇게 깊이 잠든 게 언제였는지.

아린은 가방을 챙겼다. 

“언니 어디 가시게요?”

“좀 씻고 오려고요.”

정은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녀오라는 말과 동시에 시선을 다시 화면으로 옮겼다. 아린은 작업실을 나왔다. 

복도 창에 비치는 몰골을 감추고자 얼굴을 한껏 숙이고 빠르게 걸어갔다. 그때 누군가가 아린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선배 어디 가요?”

“어?”

아린을 붙잡은 건 정우였다. 양손에는 커피와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좀 씻으러… 어제 어떻게 된 거예요?”

정우는 아린이 이야기를 마친 뒤 곧바로 잠들어 버렸다고 했다. 몇 번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업어서 수면실까지 데려왔다고. 

“추태를 부려 미안해요. 아휴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

정우는 커피라도 들고 가라며 아린에게 건네주었다. 아린은 고맙다고 말한 뒤 다녀오겠다며 정우를 지나쳐 갔다.

그런 아린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정우가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아린은 알지 못했다.


따뜻한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자 아린은 온몸이 포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유독 따뜻한 물을 좋아하는 아린은 더울 때나 추울 때나 뜨거운 물로 씻고 나와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엄마가 퇴근하기 전에 씻고 나가기 위해 서둘러 샤워를 마쳤다. 분명 선을 보라던가, 글을 그만두라는 말을 할 테니까. 어느 날부터 아린은 엄마와의 대화가 어색하고 힘들었다.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결혼을 하고 싶지도 않고, 글을 그만두고 싶지도 않으니까. 반복되는 실랑이에 결국 아린은 엄마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매일 통화는 하지만 밥은 먹었냐, 오늘 늦는다 혹은 오늘 들어가지 못한다 정도의 대화만 오갔다. 

대충 머리를 말린 아린은 입술에 립밤을 바르곤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에 넣어 둔 커피를 꺼내 들고 현관문을 나갔다. 바로 작업실로 갈 생각이었다. 어젯밤 뒤의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정우와의 대화로 머릿속에 완벽한 플랜이 짜였다. 거창한 계획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글의 방향이 정해졌달까. 

빨리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싶었다. 한때 경이롭게 듣던 민유의 리듬처럼, 연재 시간을 지키기 위해 빠른 템포로 쉴 새 없이 두드리는 정은처럼. 아린도 자신만의 리듬을 빨리 찾고 싶었다. 

잠시 후,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아린은 우선 샌드위치 가게로 향했다. 늦은 기상 덕에 아침도 점심도 거른 셈이니 비워진 위를 채워달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유리문으로 보니 오늘은 하울이 카운터에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린. 이 시간엔 잘 안 오잖아. 오늘도 사람 구경 하려고?”

아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웃으며 대답하려 할 때 하울은 다시 손뼉을 치며 되물었다.

“아 맞다! 어제 회식했다며? 그것도 날 빼고?”

두 눈을 번쩍 뜨고 하울은 아린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왔다. 아린은 두 손을 합장하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저도 갑자기 나간 거라. 나중에 우리 다 같이 해요. 꼭!”

아린은 하울의 손을 붙잡았다. 새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얼굴을 풀고 하울은 꼭 다음에 함께 하자며 웃었다. 

어제 아무도 하울을 생각하지 못했다. 존재감이 미미해서라거나 혹은 일부러 부르지 않은 게 아니었다. 작업실 사람들도 갑자기 정해진 회식이라 차마 생각을 못했다. 아린도 마찬가지. 하울의 입장에서는 같은 작가들을 위해 셰어 작업실도 운영하고 여러 가지 상황들을 배려해 주었는데 정작 모임을 가질 때 자신을 쏙 뺐다면 기분 나쁠 수 있다고 아린은 생각했다. 하지만 하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울이 새침한 표정을 해도 장난일 뿐이란 걸 아린은 잘 알고 있었다.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랑 감자 샐러드 샌드위치,  딸기 스무디 한 잔 주세요.”

“먹고 갈 거야?”

“네.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배가 너무 고파요.”

배를 문지르자 하울은 ‘으이그’라며 콧주름을 살짝 만들었다. 아린이 진동벨을 받아 들려고 하자 하울이 직접 가져다주겠다며 손을 내저었다. 감사합니다라고 밝은 톤으로 말한 아린은 늘 앉던 창가 자리로 향했다. 오늘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를 배경 삼아 여유를 먹고 싶었다. 

‘너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벌써 저녁이 다 되어가네. 하루가 아깝다.’

유리창 너머 건물 사이에 보이는 하늘을 보자 아린은 허무하게 지나간 하루가 아깝게 느껴졌다. 

출근 시간과 퇴근시간보다 조금은 한산한 오후. 하지만 여전히 주차장 입구를 막고 있는 차를 향한 클락션 소리가 들렸고 이른 아침 바삐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도 보였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각자의 삶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들. 문득, 아린은 이런 평범한 삶의 일부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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