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도쿄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린은 그 시간 동안 뭘 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날 만큼 멍하게 앉아 있었다. 정말 그저 멍하게 앞만 응시했다.
출발하기 전엔 많은 상상을 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구름을 보고, 기내식도 먹고, 착륙할 때의 짜릿함까지 아린은 머릿속에 그려 넣었었다. 하지만 비행기가 이륙한 이후부터는 머리가 멍해졌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끔 지나가는 승무원과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미소를 띤 게 다였다.
또 언제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장거리 비행엔 꿈도 꾸지 못할 비즈니스석을 예매했던 아린은 그 덕에 얻은 작은 시간의 여유도 느끼지 못했다는 게 내심 아쉬웠다.
옆 좌석의 노신사가 안전벨트를 풀고 나갈 채비를 하자 아린도 이어폰을 챙겨 넣고 내릴 차례를 기다렸다. 잠시 후 노신사 분이 나가자 아린도 따라나섰다. 참 예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단아한 승무원은 아린을 향해 즐거운 여행이 되라며 미소 지어 인사해 주었다. 그녀의 미소를 뒤로하고 비행기에서 첫발을 떼는 순간부터 아린은 긴장되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안전하게 출입국 심사를 받을 수 있을까? 영화 같은 데서 가끔 큰일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린의 머릿속은 다시 걱정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 정우가 출입국 심사를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QR코드를 미리 저장하는 등 만발의 준비를 해둔 터였다. 한국에서야 잘못해도 물어볼 수 있지만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니, 이곳에서는 뭐든 다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심사대를 빠르게 통과했다. 정우가 알려준 것도 한 몫했고 이리저리 검색해 미리 알아본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아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JR을 타기 위해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 찾아야 했다. 짐을 찾은 아린은 공항과 역이 연결되어 있는 공간에서 흡연실을 발견하곤 그곳으로 들어갔다. 꼭 안식처를 찾은 것처럼 아린은 빠르게 발을 내디뎠다.
너구리굴 같을 줄 알았던 흡연실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쾌적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게 웃기기도 했지만 그 단어 말고는 딱히 맞는 단어가 없는 것 같다. 환풍기가 잘 되어 있는지 연기도 많지 않았고 사람이 꽤 있었지만 답답하거나 탁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물론 아린이 흡연자이기 때문에 관대한 걸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린은 작은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첫 모금에 잠시 현기증이 났지만 기분 좋은 현기증이었다. 재떨이 앞 간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천천히 담배를 태우며 다시 폰을 검색했다. 나리타 공항과 연결된 길로 조금 더 걸어가면 기차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또 표를 끊어야 하니 앞이 캄캄했다. 철저히 계획을 하고 움직이는, 요즘 말로 특 J의 성향인 아린이 무작정 날아왔으니 혼란스러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 개비를 모두 태운 아린은 다시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조금 더 진정하고 나갈 참이었다. 그때, 흡연실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정우와 똑 닮은 사람이 들어오자 아린은 흠칫 놀랬다.
‘일본에서 정우하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한국 가면 전해줘야겠…’
생각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린 선배!”
아린은 순간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정우와 닮은 사람이 아니라 정말 정우였다. 이곳에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아린의 눈앞에 정우가 나타났다.
“뭐… 뭐야? 어떻게 왔어?”
너무 놀라 아린은 평소와 다르게 반말을 해버렸다.
“와 선배 비즈니스 탔어요?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젤 뒤에 들어가서 선배 찾았는데 없어서 내려서 만나야지 했는데 또 없어지고. 혹시 비행기 안 탔나 했어요. 흡연실에 있을 것 같아서 1층 흡연실로 갔다가 여기 온 거예요.”
정우는 짐을 한쪽으로 치우고 아린의 옆에 자리 잡았다.
“아니 아니. 어떻게 온 거냐고. 나랑 같은 비행기 탄 거야?”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영 불안해서. 가이드해드리려고 따라왔죠. 혹시 폐는 아니죠?”
“그럴 거면 같이 가자고 하지. 놀랬잖아… 요. 그럼 숙소는요? 정하고 따라왔어요? 글은 어쩌고? 매일 연재해야 하잖아요.”
정우는 랩 하듯 빠르게 말을 내뱉는 아린의 모습에 풋 하고 웃어버렸다.
“하하. 선배 진짜 놀랬구나. 반말하다 존댓말 하다. 그냥 말 놔요. 나도 놓을게. 숙소는 선배가 묵는 숙소 빈방 있길래 예약했고 글은 미리 일주일 분량 예약 연재로 해놓고 왔고. 저 한 번도 연재시간 어긴 적이 없어요. 그 정도 분량은 늘 비축해 두니까.”
혼자 여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 반, 왜 갑자기 따라왔을까 의문 반. 아린은 계속 물어보고 싶었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배를 마저 태우고 아린을 재촉했다.
“얼른 가요. 숙소에서 짐 풀고 밥 먹자. 여기서 기차로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리니까. 혹시 캐리어 많이 무거워?”
“아… 아니. 최소한만 가져왔어. 필요한 건 여기서 사야지 하고.”
정우는 자기랑 마인드가 비슷하다며 캐리어를 통통 쳐보였다. 맑은 소리가 나는 걸 보니 꽉 채워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린은 정우를 따라 캐리어를 끌고 일어났다. 아직도 어리둥절하지만 조금 전보다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낯선, 아니 낯설지만은 않은 남자와 여행을 해도 되는 걸까.
‘큰 의미 부여는 하지 말자. 진짜 첫 해외여행이라 걱정돼서 따라온 걸 거야. 원래 모두한테 다정한 사람이잖아.’
아린은 여행을 좋아하는, 자신을 선배라 부르는 남자 사람 친구가 생긴 거라고 담백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몇 번 와봤다던 정우는 능숙하게 길을 잡아 걸었다. 기차표를 산 정우는 두 장의 표를 아린에게 전해주며 잊어버리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잠시 후, 기차에 오르고서야 아린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고마워. 막상 도착하니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해서 흡연실에 박혀 있었는데 구세주가 나타난 기분이었어.”
“어? 그럼 나 민폐 아니지? 나도 일본 온 지 좀 되기도 했고. 선배 첫 일본 여행이라고 하니 알려주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해외여행을 한 번도 못해봤다길래 마음이 좀 그랬어. 첫 발만 잘 내딛으면 별거 아닌 건데 처음이 어렵거든. 나도 그랬고.”
“이제야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어. 비행기에서도 멍했고, 내려서도 정신없었는데.”
“즐겨. 저기 봐 선배.”
정우는 창 밖을 가리켰다. 그의 손 끝은 기차가 지나가는 길에 작은 마을들을 향하고 있었다. 어느 지점에서는 큰 건물이 보이기도 했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일본 특유의 정서가 느껴지는 집들이 보였다. 아직 그들의 삶에 뛰어들지도 않았지만 그 속에 있는 듯했다. 아린은 자신이 풍경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집들이, 그 나무들이 아린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처음 일본 와서 이때가 가장 좋았어. 어때? “
아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공감했다.
“오길 잘한 것 같아.”
“아직 그 말하기엔 이른데. 순간순간 그 말들이 떠오를 거야.”
아린이 창 밖 세상에 빠져들고 있을 때 정우는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딱히 대화가 없어도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꼭 오래전부터 함께 계획하고 온 것처럼.
얼마 뒤 곧 신주쿠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이제 내려야 한다며 정우가 아린을 재촉했다.
아린과 정우는 캐리어를 챙겨 기차가 멈추길 잠시 기다렸다. 기차에 내려 숙소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지하철로 한 정거장 정도만 가면 되지만 아린과 정우는 그냥 걷기로 했다. 잠시만 한 눈 팔면 정우를 놓칠 만큼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었다.
아린은 눈으로 정우를 좇으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하철 역 앞쪽이 공사 중이라 복잡했지만 도시라는 게 느껴졌다. 서울과 꽤 비슷한 모습이었다. 여행 온 외국인들도 보였고,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는 듯한 사람들도 보였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외형은 비슷하지만 미묘한 느낌의 차이는 분명 있었다. 하지만 캐리어만 없으면 여행객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 틈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현지인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우는 틈틈이 아린이 잘 따라오는지 뒤를 돌아 확인했다. 계단이 있거나 캐리어를 들어야 되는 상황이면 아무 말도 없이 아린의 캐리어를 들어주기도 했다. 정우는 지나치지 않았다. 얼떨결에 말을 놓긴 했지만 적당한 배려, 적당한 무심함으로 아린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선배 여기예요.”
정우를 따라 걷다 보니 도로 안쪽에 흰 건물이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호텔의 외관은 크고 깨끗했다. 호텔로 들어가자 프런트 직원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체크인도 정우 덕에 쉽게 할 수 있었다. 정우는 잠시 짧은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가며 직원과 대화를 나눈 후 아린에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방을 가깝게 줄 수 있냐고 했는데 다행히 같은 층에 방이 있었어. 복도 끝과 끝이긴 한데. 오히려 그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괜찮지?”
“나야 괜찮지. 몇 층이야?”
정우는 7층이라고 말하며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짐 풀고 3시쯤 로비에서 만날까? 밥 먹으러 가자. 오늘은 다른 걸 하기엔 피곤할 거 같고 밥 먹고 돈키호테 구경 갔다가 저녁에 술 한잔. 어때?”
아린은 좋다고 대답했다. 7층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일본 호텔 방은 한국보다 작았다. 캐리어 하나를 놓으니 방이 꽉 차는 듯했다. 아린은 캐리어를 펼쳐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교통수단을 오래 타기도 했고 한국보다 따뜻한 기온에 오는 동안 땀도 흘려 아린은 샤워를 한 후 정우를 만나기 위해 로비로 내려갔다.
정우는 아린보다 먼저 로비에 내려와 있었다. 두 사람은 호텔 로비를 나와 걸었다.
“저기 건널목 건너면 한 식당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체인점인데 맛이 괜찮더라고요.”
정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보니 한글로 크게 써진 대형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외국땅에서 보는 한글 간판이 아린은 괜히 반가웠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어서 오라며 일본어로 맞아주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메뉴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 두 사람이 한국인인 걸 눈치챈 종업원이 다가왔다.
“한국에서 오셨나 봐요.”
너무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아린은 깜짝 놀랐다. 웃으며 묻는 종업원의 말에 정우가 대답했다.
“네. 한국 분이신가 봐요.”
“맞아요. 유학생이에요. 여기 한국 분들 많이 오시는데 오실 때마다 괜히 반가워서. 하하. 점심이 좀 늦으셨네요. “
“이제 막 도착했거든요. 저도 반갑네요. 여기서 한국사람 만나니. 김치찌개랑 된장찌개, 떡갈비 이렇게 주세요.”
종업원은 웃으며 메뉴판을 받아 들고 주방으로 갔다.
“유학생이 많은가 봐.”
“응. 나도 가끔 봤었어. 그리고 도쿄 거리 걷다 보면 한국말 많이 들려. 워낙 많이 오니까.”
아린은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방금의 상황을 정리했다. 여기는 한식당이고 도쿄는 한국사람들이 많이 오지만 막상 타지에서 한국 사람을 보니 아린은 기분이 묘했다.
“뭘 그렇게 써?”
“이 상황들을 정리해 두려고. 혼자 있으면 녹음했을 텐데 여기서 하기도 좀 그렇고. 이렇게 작은 에피소드를 모으다 보면 큰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오. 작가 마인드. 좋아요. 작가들이 취재 많이 다니잖아. 솔직히 알아야 글을 쓰니까. 아는 선배는 전용 녹음기도 들고 다녀. 요즘이야 폰이 워낙 좋아져서 녹음하기 좋지만 예전은 아니었으니까.”
“나도 한국 가면 하나 살까 봐. 생각보다 재밌기도 하고. “
아린이 정우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음식이 나왔다. 생각보다 깔끔하고 맛이 좋았다. 한참 식사를 하는 도중 바깥의 시끄러운 소음에 아린과 정우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연예인들이 주로 타고 다니는 벤같은 차 앞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플래카드를 들고 있거나 선물로 가져온 듯한 종이가방도 종종 보였다. 연령대도 꽤 다양했다. 젊은 여성도 있는 반면, 나이가 지긋하신 중년의 여성분도 계셨다.
꺄하며 소리를 지르는 건 나이와 상관없는 듯 보였다. 잠시 후 차 문이 열리고 한 남성은 몸을 반쯤 내민 후 한 손으로는 넘어지지 않게 차에 지지하고 남은 한 손으로는 격한 인사로 더 큰 환호성을 유도했다.
20대 초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노란 머리에 아주 날씬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건네어지는 종이 가방들은 받아 들고는 손키스를 날렸다.
“아이돌인가?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우리 들어올 때 서 있던 줄이 저 사람 보려는 줄이었나 봐.”
“글쎄.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나도 이런 건 처음 봤어. 인기가 꽤 많은가 봐.”
“검색해 볼까?”
“하하. 관심 있어요?”
“아니. 가수인지 배우인지 궁금해서. 하긴, 뭐라고 검색할 거야. 메모나 해둬야지. “
아린은 핸드폰을 열어 지금의 상황을 또다시 메모했다.
외국이지만 한식을 먹고 있고, 일본 여성분들이 열광하는 어느 유명인을 마주하고. 아린은 아주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순간순간을 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