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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Oct 23. 2024

10. 마음이 가난해서

전 날 각자 숙소로 들어가기 전,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푹 자고 나오라던 정우의 말대로 아린은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첫날의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았는지 온몸이 뻐근했다. 삐그덕 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 대충 준비를 마친 아린은 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찍 일어난 정우는 1층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왔어? 푹 잤나 보네. 눈이 통통…”

일본에 온 후 정우와 아린은 서로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급격히 친해졌다.

“완전 푹 잤어. 뭐 하고 있었어?”

“연재한 글 확인했지. 조회수도 봐야 하고 댓글도 봐야 하고. 이거 봐. 나 오늘 실시간 베스트 1위 했어. 이거 보고 있어, 커피 가져올게. “

정우는 폰을 내밀어 아린에게 보여주었다. 정우의 말대로 가장 높은 곳에 정우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대단하다 진짜. 나는 언제 1위 해보려나.”

아린을 대신해 커피를 들고 온 정우는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그거 하려고 여기 온 거잖아. 그리고 선배는 웹소설도 아니고 굳이 1위 하려고 글을 쓸 필요는 없지. 자기가 원하는 글, 자기가 원하는 방향의 글을 써야지. 물론 독자도 따라와야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해.”

자기가 원하는 글, 자기가 원하는 방향. 그래서 여기 온 거였지.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도쿄역 근처의 대형 서점을 가자고 제안했다. 아린 역시 일본의 대형 서점을 가보고 싶었던 참이다.

“도쿄역 쪽에 큰 서점이 있어. 거기 가보자. 어차피 원서로 된 책을 읽을 순 없지만 기념으로 한 권 정도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러자. 그보다 점심을 먼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은데 있어?”

정우는 도쿄역 근처의 식당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오늘은 오다도 가고 왔다 갔다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밥 먹고 서점 들렀다 바로 움직이는 게 어때요?”

“좋아. 오다… 꼭 가보고 싶었어. 예전에 친구가 오다 사진을 보여줬는데 나는 오다가 어디인지 몰랐거든. 친구가 보여준 사진을 보고 미국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 자유의 여신상인줄 알고 말이야.”

지금은 만나지 않는 그 친구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악의는 없지만 무안함을 자주 안겨주던 친구. 농담과 무례함을 오가던 그 친구는 오다의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미국이라 말했다며 박장대소하던 그 순간 아린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럴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불편한 인연을 굳이 이어가지 않은 건 아직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참으면 되고, 조금만 이해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시간들이 무너졌던 시기에 아린은 몇 명의 친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정리했다. 친구뿐 아니라 지인들도 마찬가지 었다. 

착한 사람 증후군에 빠져 그저 좋은 사람으로만 남으려고 노력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로 인해 스스로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누군가에게 아린 스스로도 그런 존재였을 거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아마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던 지인들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고, 이별을 고하던 아린에게 악담을 퍼부었던 그 예전 연인이 그랬을 것이다. 

“선배?”

정우는 오다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멈춰버린 아린을 불렀다.

“아, 미안 뭐라고 했지?”

“아무 말도 안 했어. 자유의 여신상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대부분 그렇게 부르니까.  밤에 보는 게 좋지만 숙소까지 올 때 힘들까 봐. 낮이라도 괜찮죠?”

“당연하지. 낮이든 밤이든 우리가 가는 목적지가 다른 건 아니잖아. 배고프다. 얼른 서점으로 가자.”

아린은 테이블 위의 잔을 치우고 정우와 함께 호텔을 나왔다. 


“도쿄 역 정말 이쁘네.”

“선배, 여기 서봐요. 사진 찍어줄게.”

정우는 역 앞 광장에서 도쿄 역을 향해 아린이 서도록 손짓했다. 남이 사진을 찍어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아린은 어색한 포즈를 이어갔다. 결국 정우의 도움을 받아 멋진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유난히 맑은 날씨덕에 도쿄역에서 찍은 모든 사진은 성공적이었다. 잠시 사진을 찍으며 여유를 부리던 두 사람은 서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사진을 많이 찍었어.”

“남는 게 사진이래. 더 찍어야 해.”

정우는 사진작가처럼 손을 네모나게 만들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동네 길냥이를 마지막으로 멈춰있던 아린의 사진첩이 계속해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높이가 꽤 있는 건물 전체가 서점이라고 했다. 입구부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서점으로 들어서자 아린은 책의 무게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서서 책을 읽는 사람, 원하는 책을 찾는 사람들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는 책 속에서 거닐고 있었다. 

서점에 가면 아린은 책의 품속에 안겨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책 냄새, 위풍당당한 듯 서 있는 반듯한 모습. 그리고 모든 걸 포용한다는 듯 감싸는 책의 기운. 세상 모든 걸 가진듯한 기분. 서점에 있으면 부자가 되는 것 같았다.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넋 놓고 바쁘게 움직이던 아린을 정우가 붙잡았다.

 ”선배, 돌아보기 전에 여기 맨 위층에 식당 있는데 식사부터 할래요?”

시계를 보니 오후 12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서점에 흥분해 허기가 진 것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야겠다. 먹고 힘내서 둘러봐야지.”

아린은 미리 보는 것도 아까워 고개를 푹 숙이고는 정우를 따라갔다. 누군가 봤다면 유난이라고 했겠지만 아린에게 서점이란 그런 존재였다. 자신의 삶에 길을 비춰주는 가로등 같은 존재. 아린의 걸음걸음마다 책들이 빛을 비춰주는 것 같았다. 

책 냄새가 옅어질 때쯤 엘리베이터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갑자기 훅 바뀐 공기의 흐름에 아린의 뱃속은 요동쳤다.

“냄새 맡으니까 갑자기 너무 배고파.”

정우와 아린은 빈자리에 앉고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앞 쪽에 “BEST”라고 적힌 사진을 보니 이곳에서 제일 잘 팔리는 메뉴인 듯했다. 두 사람은 세 개의 메뉴와 콜라와 생맥주를 시키고는 잠시 기다렸다. 

 맛있는 냄새에 정신이 팔려 미쳐 보지 못했던 레스토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임에도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절반 정도의 테이블만 채워져 있었다. 원래라면 꽉 채워져 있을 텐데 평일이라 그럴 수도 있다는 정우의 말에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직원이 콜라와 생맥주를 먼저 가져다주었다. 대낮에 맥주를 시킨 정우에게 의아해 물었을 때 정우는 이런 여행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낮술을 쉽게 못 마시잖아요. 일도 해야 하고, 남의 시선도 있고. 운전도 해야 하고.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여행할 때는 생맥주 한 잔 하고 걸으면서 취기를 날리고, 또 한잔 하고. 최고지. 대신 과음하지 않고. 일본이라 낮술이 가능하다는 건 아니고 내 시간이 여유가 있으니까.”

“그것도 그렇겠네. 여행중일 때만 할 수 있는 일. 이런 데는 많이 와봤어? 일본 레스토랑이나 식당들. 어제처럼 한식당 말고.”

정우는 생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아니. 혼자 왔을 때 3일 내내 소바만 먹었어. 먹는 거에 딱히 집착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맥주만 있으면 아무거나로 한 끼 채우면 되니까.”

“어떻게 소바만 먹어? 그것도 3일 내내? “

아린의 반응과는 달리 정우는 반응은 태연했다.

“왜 못 먹어. 내가 소바를 좋아하기도 하고 시원하고 딱 좋지. 지금은 선배랑 같이 다니니까. 혹시 나 때문에 배고파도 말 못 하고 그럴까 봐 끼니때 되면 어디든 가는 거야. 맛집도 검색해 보고.”

정우의 말에 아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정우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왜 여기까지 왔는지 정확한 대답을 듣지도 못했다. 혹시 아린 때문에, 오로지 자신을 위해 온 건지 물어보기에는 그 질문조차 말도 안 되는 거라 생각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거 같아 아린은 “고맙네.”라고 짧게 대답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타이밍에 직원이 음식을 가져다주어 어색한 기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선배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

스테이크에 시선을 둔 채 열심히 칼질을 하던 정우가 물었다. 

“선배가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가 뭐야? 소설을 쓰는 게 꿈이었어?”

“아니. 처음에는 꿈도 못 꿀 꿈이었지. 책을 읽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소설을 쓴다? 글을 쓴다? 전혀 생각도 못했었어.”

“그럼?”

아린도 포크와 나이프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시선도 고정되어 있었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받아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왜 글을 쓰기 시작했는가, 왜 소설을 쓰고 싶은가. 

아린은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 

“마음이 가난해서.”

가난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정우의 칼질은 멈추었다. 

“가난? 마음이 가난해?”

“이게 스테이크 썰다가 할 얘기는 아닌데. 하하.”

멋쩍은 아린의 웃음에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린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가난해서. 돈이 없는 것도 슬프고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마음이 가난하단 건 절망이었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었어. 살기 싫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사는 게 참 재미없다. 이런 생각이 가득 찼을 때가 있었거든. 그게 참 무섭더라. 삶의 의욕이 없어지거든.”

정우는 아린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삶의 의욕이 없어지니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그런데 또 밖에서는 그런 티를 안 내. 아니 못 냈지.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밝은 사람이었으니까. “

“그런 사람들이 더 무섭지. 티를 내지 않으니까.”

정우의 공감에 아린은 살짝 울컥했다. 그때의 감정이 다시 떠올라서라기보다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한 편의 시를 읽었어. 사실 지금은 그 작가가 누구였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생각이 안 나. 유명한 시인은 아니었던 것 같아. 블로그에 있던 글이었어. 읽었을 때는 굉장히 평범한 시었거든. 그런데 그 글 댓글에 누군가가 그의 시를 자신의 생각으로 해석을 한 거야. 내재된 뜻이라고 해야 할까. 시 속에 들어있는 화자만의 마음. 그걸 꿰뚫는 듯한 해석. 사람마다 해석하는 차이가 다르지만 그 사람이 쓴 글을 읽고는 정말 충격이었어. 이렇게 밝고 평범한 시에 숨어있는 속 뜻이 이렇게나 깊은 건가 하고. 또 다른 나를 보게 된 기분이랄까. 그렇다고 선뜻 시를 쓰기 시작한 건 또 아니었어. 그때 난 아무것도 할 줄 몰랐거든. 시라는 게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어떤 단어들을 써야 하는지.”

정우는 맥주를 마시면서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린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다 어떤 노래를 들었는데, 가사가 시 같은 거야. 연인을 너무 사랑한다는 이야기였는데 마지막 가사에 이별이 암시되어 있었거든. 이게 시구나 싶었지. 어려운 시어와 내재되어 뜻을 찾기 위해 시를 파헤쳐야만 하는 것만이 시가 아니라, 일상을 이야기하고 노래를 부르듯 마음을 전하는 것.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어. 물론 시인들이나 문인들이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그런 건 시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나도 내 이야기를 썼어. 내가 겪은 일들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로. 그런데 짧은 시어들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니 내 역량이 너무 부족한 거야. 문득 보면 산문시가 되어있고 어떤 건 그냥 푸념처럼 보였고. 그렇게 흘러 흘러서 소설까지 온 거지.”

“그거네.”

잔을 내려놓은 정우는 두 손을 맞잡고 턱을 괴었다. 

“선배가 쓰고 싶은 글의 방향. 하고 싶은 글. 그거 아니에요? 노래처럼, 어렵지 않은 글을 전하는 거.”

아린은 순간 탁 하며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노래처럼. 어렵지 않은 글. 처음 시를 쓸 때 가졌던 마음가짐. 

아린의 마음속에 그때 그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왜 그걸 잊고 살았을까. 시와 소설을 쓸 때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게 어려운 단어를 쓰지 않는 것. 문장의 흐름을 짧게, 누구나 이해하고 흐름을 따라올 수 있는 글. 

공모전에서는 탈락할 수 있는 가벼운 문장들이지만 사람들에게 빠르게 읽힐 수 있는 글. 쉽게 이해하고 마음으로 흥얼거릴 수 있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책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입문 편으로 추천할 수 있는 그런 소설 말이다. 그런데 공모전 당선 이후 성공한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고 좀 더 고급진 글을 써야 한다는 마음으로 어려운 단어들을 배열하고 문장의 호흡을 길게 만들었다. 누가 봐도 “난 작가다.”라고 티 내고 싶어 하는 글. 

아린의 초심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우의 한마디에 아린이 잊고 있던 그 마음들이 멀리 떠났다 돌아오는 파도처럼 큰 파고를 그리며 밀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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