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그랬어. 그거야 내가 꿈꾸던 소설.”
아린은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팔을 들어 올렸다. 당황한 정우가 눈짓을 보냈지만 아린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선배. 칼… 내려요 사람들 쳐다보는데.”
정우는 한 손으로 입 한쪽을 가리고 작은 목소리로 아린을 불렀다. 그때서야 아린은 포크와 나이프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살짝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린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정우야. 나 이제 진짜 제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아.”
정우는 아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정우야라고 부른 거 알지? 정우 씨라고 부르다가 말 놓고 나서는 이름은 부르지 않더니.”
“아… 그랬나? 암튼 고마워. 그걸 왜 잊고 있었지? 노래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노래하는 소설? 뭔가 몽글몽글한 느낌인데요?”
아린의 얼굴은 정우가 아린을 만난 후 가장 밝고 편안해 보이는 보였다. 무언가에서 해방된 얼굴.
아린은 연신 정우에게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정우는 손을 저었다.
“선배가 직접 찾은 걸. 선배 얼굴 보니 내가 다 기분이 좋네.”
“좋아. 행복해. 나는 대단한 문학 작품을 쓰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 후대에 길이 남을 글을 남기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잘 읽히고, 잘 이해하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갔을 때 모든 내용이 이해되는 글이었어. 이제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아.”
거짓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진심의 말이라는 걸 아린의 표정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정우와 아린은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남은 식사를 마무리했다. 아린은 어제 파친코에서 딴 돈으로 계산하겠다며 계산서를 들고 성큼성큼 카운터로 걸어갔다.
“괜찮은데. 그걸로 선배 사고 싶은 거 사.”
“내가 사게 해 줘. 기분도 좋고. 이제 서점 구경하면서 또 신날 거거든. 오늘은 가진 돈 다 털어도 행복할 거 같아.”
정우는 아린의 말에 내밀었던 카드를 다시 지갑에 넣었다.
“이 선배 조금만 더 기분 좋았다가는 집도 내줄 기세네.”
정우의 농담에 아린은 크게 웃었다. 아무래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 모양이다. 늘 차분하고 조용하던 아린의 색다른 모습에 정우마저 덩달이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두 사람은 한껏 업된 상태로 서점으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금 전의 텐션은 사라지고 차분함을 되찾았다. 서점이란 그런 곳이었다. 모든 것을 0으로 돌리는 곳. 주체할 수 없이 기쁜 마음도, 주저앉고 싶을 만큼 슬픈 마음도 이곳에서는 모두 0이 된다. 아린은 그랬다. 모든 것이 리셋된 이곳에서 책을 만지고 느끼며 새로운 1을 향해 마음은 서서히 움직였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지만 번역 어플을 써가며 책의 제목이라던가 간략한 내용을 확인하며 천천히 서점을 돌아다녔다.
가끔 보이는 번역된 우리나라 작가의 책이나, 한국어 책들을 보면 괜히 반가웠다. 외국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아린은 그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정우와 아린은 서점에서 3시간을 머물렀다. 아린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정우는 현재 베스트셀러 있는 책을 한 권씩 챙겨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대화 주제가 열 번 정도 바뀌었을 무렵 오다에 도착했다.
오다의 공기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평화롭고 상쾌한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밤이 되면 반짝인다던 다리는 낮의 차분함을 보이고 있었다. 정우와 아린은 바로 앞 카페에서 커피를 산 후 다리 방향으로 놓인 벤치에 앉았다. 살짝씩 불어오는 바람이 마음을 정화했다.
그때, 옆 벤치에 앉아 있던 일본인 커플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는 여자와 고개 숙인 남자. 두 사람은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먼저 일어선 남자는 여자를 향해 깊이 고개 숙이고 떠났고 여자는 남자의 팔을 잠시 잡았다. 하지만 이내 잡을 수 없음을 감지한 여자는 남자의 팔을 놓아주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아린과 정우는 들리지 않는 척 앞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 참을 울던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반대쪽으로 향해 걸었다.
숨도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이별한 거 같지?”
아린이 물어보자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좋은 곳에서 이별이라니. 아닐 수도 있지만 정말 두 사람의 이별이라면 오래도록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것 같아. 너무 좋은 곳에서, 정말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 난 못 잊을 것 같거든.”
“나도 그래. 내 이별도 아프지만 다른 사람의 이별을 직접 보니 이것도 마음이 아프네. 여자도 남자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린은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순간의 가장 슬픔 사람. 그녀의 어깨가 유난히 작게 느껴졌다. 정우 역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도 연민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 여자가 사라져 갈 때쯤 두 사람은 시선을 거두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마음이 아릿아릿하네.”
“예전 연인 생각나요?”
정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린은 한 모금 머금었던 커피에 사레들리고 말았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너무 애틋하게 보길래.”
“드라마로 보는 이별도 슬픈데 직접 봤으니 그렇지. 내 이별은 아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연애에서는 냉정한 편이야. 물론 어떤 상황에서 함께 했던 연인이 생각나기는 하지만 그립거나 미련이 있는 거 아니야. 연애할 때 최선을 다하고 헤어질 때는 미련 없어.”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아직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만난 건 아니에요? 어떻게 딱 잘릴 수가 있어.”
“당연히 한동안은 힘들지. 그래도 최선을 다해 잊으려고 해. 다시 만난다고 해도 같은 이유로 헤어질 건 뻔하니까.”
“선배 완전 단호박이네.”
“연애에서만. 헤어질 때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럼 넌?”
정우는 커피를 옆에 내려놓고 머리 뒤로 손깍지를 꼈다.
“난 다 해봤지. 비굴하게 매달려 보기도 하고. 자니? 도 해보고.”
“으…”
“하하. 선배 표정 너무 리얼한 거 아니야?”
아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반대로 나한테 그렇게 한 사람도 있었고. 선배 말대로 헤어지는 이유는 다 있으니까.”
“지금도 생각나는 연인이 있어?”
정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린은 그의 행동에 아직 마음에서 잊지 못한 연인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정우의 의외의 대답에 아린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요. 지금은 다른 사람이 마음에 있어서. 전 연인은 생각나지 않아요.”
다른 사람? 매일 작업실에 붙어 있었는데 언제 다른 사람이 생긴 걸까. 아린은 궁금했다. 그리고 순간 머릿속에서 정은이 떠올랐다.
“혹시…”
“혹시?”
정우는 알고 있냐는 표정으로 아린을 바라보았다.
“정은 씨?”
“네?”
“아, 아니야?”
“정은 씨는 동료죠. 그리고 정은 씨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는데?”
“응? 정은 씨가 좋아하는 사람 너 아니야? 난 그런 줄 알았는데.”
정우는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된다며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하지만 아린은 세세한 이야기를 모두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냥 분위기상?”
“에이. 아니야. 정은 씨가 선배한테 말한 줄 알았는데 안 했구나. 오래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대. 나랑 이미지가 비슷해서 처음 내가 왔을 때 깜짝 놀랐다더라고. 오랜 친구사이였는데 고백은 한 번도 안 했다나 봐. 친구 사이도 깨질까 봐. 그런데 나를 볼수록 그 사람이 생각이 나더래. 그런데 그 남자는 주변에 인기도 많고 자신은 너무 평범하다고. 평범한 것보다 그 친구한테 부족하다고 느낀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용기 내서 고백해 보라고 조언했고. 어차피 친구로만 남을 수는 없다고. 친구로도 남지 못한다고 고백조차 못해보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냐고 했어. 고민하는 눈치더라고. 며칠 예민하고.”
늘 예민하여도 생각했기 때문에 아린은 정은의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생각보다 깊은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린은 정우와 대화하는 자신을 질투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민망해졌다.
“전혀 몰랐어. 우리는 그런 대화는 안 해봤거든. 그래서 정은 씨가 긴 얘기는 돌아와서 하자고 했구나. 도쿄 도착했을 때 톡이 왔었거든.”
“그럴 거야. 굉장히 예민하고 날카로워 보이지만 대화해 보니 속도 깊고 좋은 사람이더라고.”
아린은 정우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정은을 대할 때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린은 늘 정은이 자신에게 예민하게 대한다고만 생각했지만 어쩌면 자신이 더 그녀를 예민한 시선으로 바라본 건 아니었나 생각했다.
“선배도 마찬가지.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속은 따뜻하거든. 표현할 줄 모르고 따뜻한 마음을 숨기려고 하는 사람. 내 눈엔 그렇게 보였어.”
따뜻한 마음을 숨기려는 사람. 아린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그리고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착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을 뿐, 아니 착한 사람으로 보이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지 스스로 따뜻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니야. 나는…”
“그래서 선배 좋아해.”
정우는 아린을 마주 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조금 전 정은의 이야기를 할 때 아린과 맞추던 시선은 반짝이는 강 위로 던져져 있었다.
“좋아해요. 아니 좋아졌어요. 선배한테 어떤 대답을 들으려고 하는 말은 아니야. 일본에 오면서 꼭 이 말은 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렇다고 불편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갑작스러운 정우의 고백에 아린은 당황했다. 정우가 일본에 따라왔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모든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절대 아닐 거라고 단정 지었다. 6살이나 많은 여자를, 34살이나 돼서 마땅한 직업도 없고 막연한 꿈을 꾸고 사는 사람을 왜?라는 말만 입 속에 맴돌았다. 그러다 겨우 나온 한마디가 “나이도 많은 나를 왜?"
라는 말이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래. 선배 조선시대 사람이야? 요즘 10살 연하, 아니 15살 이상 차이나는 연상 연하 커플도 많은데. 선배가 6살 많아도 밥은 내가 더 먹었어.”
재치 있는 정우의 말에 분위기가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아린의 마음은 복잡했다. 아린은 정우의 말을 듣기 전까지 알아채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됐으니까. 하지만 아린은 애써 마음을 누르려 했다.
“정우야, 나는…”
“대답 안 해도 돼 선배. 날 좋아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혹시나 나중에 선배 마음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온다면 그때 말해줘. 직접적으로 말하기 곤란하면 음, 휴게소 감자 먹으러 갈래?라고 하던가.”
“하하하. 뭐야 그게. 진지한 순간에 그런 말이 나와?”
“진지할 거 없어요. 나는 선배를 좋아해. 여자로서의 선배도 좋지만 나는 인간대 인간으로 선배를 좋아하는 마음이 먼저였으니까. 내가 선배를 좋아하지만… 좋아해요. 답은 하고 싶을 때 천천히. 안 해도 기다리거나 재촉하지 않을 거니까.”
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린도 정우에게 마음이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처음이 늘 어려운 아린에게는 지금 당장 무언갈 결정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아린의 마음을 미리 알고 진지하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이 순간을 마무리해 준 정우가 고마웠다.
“이제 갈까요? 우리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선배가 말하던 곳과 비슷한 골목이 있대요. 전에 책에서 봤다던 분위기랑 비슷한 곳.”
“정말? 얼른 가자.”
아린과 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전 고백했던 순간은 고이 접어두고 두 사람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일본의 거리에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