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고 나니 아린과 정우는 피로가 몰려왔다. 그렇다고 바로 숙소로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정우는 식당 근처의 상점을 가리켰다. 일본에서 저렴하기로 유명한 가게였다.
정우는 일본에 오면 그 가게에 들러 간식거리를 잔뜩 산다고 했다. 캐리어가 꽉 찰 정도로 채워와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고.
“그래서 빈 캐리어를 끌고 왔구나.”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를 따라 들어간 매장 안은 규모가 꽤 컸다. 사람도 많았지만 눈이 휘둥그레 해질 만큼 물건도 정말 많았다. 아린은 천천히 둘러보며 간식들을 바구니에 채워 넣었다.
“선배. 우리 있는 동안 매일 조금씩 사서 나르면 되니까 한 번에 너무 많이 넣지 마. 들고 갈 때 힘들어.”
“응”
이것저것 많이 담아야겠다는 속마음을 들킨 건지 정우는 선뜻 손을 내미는 아린을 제지했다. 아린은 마구잡이로 담아 넣던 손을 거두고 다시 천천히 매장을 돌았다. 옷부터 과일, 술까지 없는 게 없었다. 아린은 엄마를 위해 먼저 파스와 유명하다는 소화제를 몇 개 집어넣고 과자와 젤리들도 담았다. 그리고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니 화장품 코너가 보였다. 한국에서는 하나에 만 원짜리가 여기서는 절반 가격이었다. 처음엔 화폐가 헷갈렸지만 차츰 적응해가고 있었다.
“선배 안 무거워? 들어줄까?”
“아니 괜찮아.”
잠시 다른 곳을 둘러보던 정우의 바구니도 꽉 차 있었다. 한 시간 정도를 둘러본 두 사람은 계산대로 향했다.
멈추지 않는 바코드 음을 듣고 아린은 살짝 움찔했다.
‘가져온 돈을 여기서 다 쓰는 건 아니겠지.’
마지막 음이 들리고는 직원이 가격을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외국인인걸 눈치챈 모양이다.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아 아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린은 지폐가 헷갈리지 않게 꼼꼼히 세어보고는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두 개의 봉투에 꽉 차게 담겨졌다. 정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욕심부렸나. 무겁네.”
정우는 아린의 짐을 덜어주려 했지만 아린은 괜찮다며 정우의 뒤를 따랐다. 아린은 숙소가 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숙소에 짐을 넣어두고 아린과 정우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오는 길에 정우가 파친코에 가보자는 얘기를 했기 때문에.
“파친코 도박 아니야?”
소설책으로 본 게 다인 파친코를 하러 간다니. 아린은 신기하기도 하면서 내심 기대도 되었다.
“도박인데 여기는 합법이니까. 나도 우연히 몇 번 해봤는데 재밌어. 한 번 해보고 재밌다고 집에 가기 싫다고 하면 안 돼.”
“에이 설마. 조금 잃으면 숙소로 가자 하겠지.”
“거기까지는 좀 걸어야 해요.”
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우와 도쿄를 걸었다. 기차와 식당에서 본모습과 달리 직접 도쿄 거리를 걸어보니 우리나라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환경에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왕복 4차선 도로 위의 건널목 앞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많은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꼭 이곳에서 오래 산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지만 시끄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조용하다고 해야 할까. 큰 소리를 내는 사람도, 소란스러운 상황도 없었다. 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앞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상해.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차분한 느낌이야. 조용하고.”
“맞아요. 나도 한 번씩 일본 오면 느껴. 우리나라도 대부분 그렇지만 느낌이 좀 다르지.”
맞다.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이었다.
차분함 속에 건널목을 건너자 사람들의 분위기와 상반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고 있었다. 얼른 이리로 들어오라는 손짓 같았다.
정우는 능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깥의 상황과 달리 파친코 안은 굉장히 시끄러웠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기계음들로 꽉 차 있었다. 어릴 때 사촌오빠를 따라갔던 오락실 소리와 비슷했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 두 사람은 흡연실로 들어갔다. 파친코 안에는 곳곳에 흡연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흡연실 앞에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궁금해진 아린은 정우에게 물었다.
“저 숫자들은 뭐야?”
“아, 코로나 때 인원수를 제안해 놓은 거야. 만약 2명이 적혀 있으면 2명밖에 못 들어가. 한 사람이 나오면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있어.”
아린은 그렇구나라고 말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흡연실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꼭 작업실 옥상 흡연실과 비슷해 보였다. 환기도 잘되어 연기는 금세 사라졌다. 정우는 흡연실들이 가까우니 게임을 하다 편히 다녀오라고 했다.
두 사람은 잠시 후 흡연실을 나와 앉을자리를 찾아다녔다. 정우는 기계 위의 화면들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아린에게 자리를 선택해 주었다.
“선배 여기 앉아. 나도 전에 왔을 때 우연히 한국 파친코 너튜버 만나서 자리 선정하는 법을 배웠거든. 잠깐 귀동냥한 거라 잘은 모르지만 여기가 괜찮을 거 같아. 나는 이 옆에서 할게.”
정우가 선택해 준 자리에 앉아 우선 기계를 살펴보았다. 지폐를 넣는 곳, 카드를 넣는 곳, 버튼들. 그리고 옆 자리를 슬쩍 보니 화면 앞에 있는 무언가 들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정우는 만 엔을, 아린은 천 엔을 넣고 게임을 시작했다. 도박을 왜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아린으로서는 많은 돈을 쓰는 게 아까웠다.
처음 게임은 지루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슬 돌아가는 것만 바라보고 있자니 아린은 피로가 몰려왔다. 결국 버튼을 잡은 채 아린은 졸기 시작했다. 그때,
“어? 아가씨! 됐잖아. 돌려야지. 돌려야지!”
당연히 일본 분일 거라 생각했던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아린의 어깨를 툭툭 쳤다. 화들짝 놀란 아린은 허둥거렸다. 옆에서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정우가 방법을 알려주었다. 화면에서는 신난 음악과 함께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옆에서는 아주머니의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계속 돌려. 계속. 아가씨 앉자마자 터지네. 아까 여기 앉을걸 그랬어.”
“한국에서 오셨어요?”
“응. 가족 여행 왔는데 다들 안 간다기에 혼자 왔지. 휴. 그런데 내일 아침 비행기로 가야 해. 아가씨 계속 돌려! 아가씨 계속 터진다. “
그 와중에도 아주머니는 아린의 화면을 보고 있었다.
“아가씨 운 좋네. 처음이야?”
“네.”
“초심자의 행운이네. 나는 3박 4일 동안 매일 100만 원씩 잃었어. 오늘은 만회 좀 해보려고 했더니 영 안되네.”
“매일 배…백만 원이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최소 300만 원을 잃었다는 거다. 아린은 어떻게 그렇게 잃을 때까지 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좋겠다 아가씨는. 나도 다른 자리로 옮겨야겠다.”
아주머니가 떠나자 조용히 듣고 있던 정우가 아린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선배 계속 돌려요. 조는 거 같더니 잘하네.”
“잘하긴 뭘. 그럼 지금 얼마나 딴 거야? 따긴 딴 거야?”
“음. 지금 한 20만 원?”
“뭐?”
잠깐의 순간에 20만 원을 얻었다는 말에 아린은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선배 워워. 선배도 저 아주머니처럼 중독되는 거 아니야?”
정우는 아린을 놀리며 웃었다. 잠시 후 화면이 처음과 같이 바뀌었다. 정우가 이제 끝났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리고 버튼을 누르자 카드가 한 장 튀어나왔다. 정우는 카드로 게임을 더 해도 되고 나가면서 바꿔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혹시 다른 것도 해보고 싶으면 자리를 옮겨도 괜찮다고도 했다.
아린은 굳이 자리를 옮기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까 다 둘러보지 못한 파친코를 구경하고 싶었다. 아린은 커피를 뽑아 오겠다며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조금 전 입구에서 보이던 일본의 자판기가 궁금했다. 요즘 우리나라는 자판기보다는 카페가 많아져 자판기를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신기하기도 했고 다양한 음료를 먹어보고 싶기도 했다.
아린은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파친코를 둘러보며 자판기들도 살펴보았다. 자판기마다 음료가 조금씩 다른 듯 보였다. 음료를 뽑기 전 자판기와 파친코 내부를 사진으로 찍어두고 아린은 레몬 그림이 그려진 음료 두 개를 뽑았다. 일본어를 모르니 어떤 음료인지 알 수는 없지만 레몬 그림을 보고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아린은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음료 뚜껑을 열어 맛을 본 아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세히 보니 녹차와 레몬이 섞인 음료인 것 같았는데 정말 맛있었다. 레모네이드처럼 상큼하지만 너무 톡 쏘지는 않는 맛에 아린은 그대로 하나를 더 뽑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정우야. 이거 마셔봐 이거 진짜 맛있어.”
정우에게 음료를 하나 건넨 후 아린은 자리에 앉아 음미하듯 음료를 다시 마셨다.
“한국 갈 때 몇 개 더 가져가고 싶다.”
아린의 권유에 한 모금 마셔본 정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판기에서 몇 번 봐도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진짜 맛있네. “
“그렇지? 여기 있는 동안 매일 하나씩 먹어야겠어. 숙소 갈 때도 사가고.”
“하하하. 선배 여기 자판기 탐방 온 거 같아. 이따 편의점 가보자. 일본 왔으면 편의점도 한 번 털어봐야지.”
아린은 응, 이라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아린의 기계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5000엔을 더 쓰고 나서 흥미를 잃은 아린은 정우에게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다. 정우는 하나도 따지 못했는지 허탈한 표정이었다.
“만 엔 다 잃은 거야?”
“응. 괜찮아. “
“나보고 아주머니처럼 중독되면 어쩌냐고 하더니.”
괜찮다고 말하지만 표정은 괜찮지 않았다. 정우의 그런 모습을 보자 아린은 웃음이 나왔다.
“내일도 시간 나면 오자. 내일은 내가 점심 저녁 다 쏠게. 돈 딴 기념으로.”
지폐를 들고 흔들며 놀리자 정우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파친코를 나와 다시 숙소를 향해 걸었다. 조금 전보다 어두워진 밤거리는 더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