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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페이 하시나요

by 김세인
집 안을 아름다운 물건으로 장식하기 전에 먼저 벽을 깨끗이 치우고 우리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름다운 살림과 아름다운 생활이 바탕이 되는 것이다.
『월든』 중에서


소로가 지었던 월든 호숫가 오두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4달러로 바닥이 흙으로 된 판잣집을 사서 28달러를 들여 굴뚝을 세우고 지붕널을 달았다. 그리고는 빽빽한 소나무가 뿜어내는 공기를 마시고, 떡갈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호사를 누렸다. 집안에는 벽난로, 침대와 의자, 식탁, 계절별로 두세 벌의 옷과 신발, 옥수수 가루에 소금만 넣어 만든 옥수수빵 정도가 있었으리라 상상해 본다.


우리 집 팬트리 공간들을 합치면 소로의 5평 오두막 크기 정도 될까.

어느 날, 나는 팬트리에 엉망으로 늘어진 장난감들을 보고 아이를 혼낼 참이었다. 팬트리를 한 바퀴 둘러보니 아이가 정리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서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건들이 분류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작은 공간에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뒤죽박죽 쌓여 있었다. 보드게임, 동화책, 장난감 칼, 장난감 자동차, 레고, 아이언맨 피규어, 여행 갈 때 샀던 기념품들....


나는 종량제 봉투를 가져와 버릴 것들을 구분했다. 깨끗하고 쓸만한데 아이들이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은 것들은 따로 모았다. 그냥 버리긴 아까워 주변 지인들을 떠올렸지만 마땅히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당근 마켓이 떠올랐다. 한 번도 물건을 사고 판 적은 없었지만 일단 가입했다.


처음으로 내가 거래한 물건은 아이의 장난감 칼이었다. 아이에게 동의를 구하고, 5천 원에 사진을 올렸다. 팬트리 한 칸 한 칸을 정리하다 보니 아이들이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는 보드게임, 동화책, 장난감들이 한없이 나왔다. 과감하게 버리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처음엔 5천 원, 1만 원에 내가 가진 물건을 판다는 게 번거롭고 돈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물건을 살 사람과 팔 사람이 서로 시간을 맞추고 적정 가격을 정해서 거래한다는 게 피로하기도 했다. 한 번 두 번 하다 보니 그것도 차차 요령이 생기고 익숙해졌다.


무언가를 팔아서 돈을 벌었다기보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정리했다는 사실이 때를 민 것처럼 개운했다. 한 공간을 정리 정돈하고 나니 자꾸 찾아가 열어 보게 되었다. 아이들의 옷장도 열어봤다. 작아져서 입지 않는 옷들이 보였다. 깨끗한 아우터들과 모자들은 드라이클리닝을 해서 당근 마켓에 올렸다.


하루는 내 서랍을 열어 정리하다 보니 선물 받은 커피 쿠폰과 아껴 놓은 백화점 상품권이 나왔다. 쿠폰을 빌미로 커피에 디저트까지 얹어 먹었고, 상품권을 믿고 없어도 되는 물건을 호사스럽게 샀던 일들이 떠올랐다. 비트코인을 사면 언젠가 일확천금을 벌 것만 같으니 커피 한 잔값은 나의 쾌락과 쉽게 교환했다.


돈을 쓰는 일은 손가락 까딱하는 것만큼 쉬운데 만 원짜리 물건을 팔아보니 돈을 벌고 모으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껴졌다.


어느 날 당근마켓 채팅에서 한 사람이 물었다.


“당근페이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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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근페이가 뭔지 잘 몰라 되물었다. 당근페이는 당근마켓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계좌였다. 편리할 거 같아 나도 가입했다. 이후에 거래할 때는 당근페이로 돈을 받으니 계좌로 받아 커피 값으로 쉽게 흘러가던 작은 돈들이 흩어지지 않고 모였다. 이제 그곳은 새로운 비밀 통장 같은 공간이 되었다. 조금씩 돈이 모이는 재미에 우리 집에 웬만한 물건들은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서랍을 뒤지면 돈이 나왔다.

진짜 돈이 나올때도 있었지만 있는지도 몰랐던 물건이 나와 소비를 덜 하게 되고, 작은 돈의 가치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돈의 속성』의 저자 한승호 회장은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뉴욕 맨해튼 백화점 앞에서 한 걸인 봤다고 한다. 그 걸인은 저녁때가 되자 구걸통 안에 담긴 동전 몇 개를 골라내더니 길바닥에 버리더란다. 몇백 억의 자산을 가진 그는 걸인이 내던진 3 페니 동전을 주워 소중히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고 한다. 이 동전들은 ‘돈의 씨앗’이다라고 중얼거리며.


내가 정의한 정리정돈은 ‘현재’를 사는 일이다.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준비하면서도 현재를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내가 얻은 답의 한편은 내 삶에 불필요한 것과 필요한 것을 하나씩 분별해 나가는 것이다.


간소하고 단순하게.


소로가 히코리나무 숲 한복판에 최소한의 재료로 집을 지은 건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라고 했듯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남기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내일 죽을지도 몰라서라기보다 원하지 않는 파도에 휩쓸리고 매몰되지 않기 위해. 팬트리부터 냉장고, 핸드폰 속 사진, 가방, 관계들이 머릿속 맑은 정신에 이를 때까지. 애초에 정리할 것들을 만들지 않는 정신적인 습관을 갖출 때까지.


집 안부터 삶의 많은 단면들을 정리 정돈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사람은 자신만의 태도와 방식인 고급 아비투스를 지니게 될 것이다.


내가 사 모은 건 비트코인이 아니라 당근코인들이다.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 나의 당근계좌에 쌓였다. 내가 꺼내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쳤다. 월급날이 다가올 때쯤 생활비 잔고가 비면 이체하고 싶은 유혹이 왔지만 꾹 참았다. 당근코인을 모으며 나는 소소한 돈 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당근코인들이 내 비자금의 종잣돈이 될지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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