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백억짜리 아침식사〉라는 방송을 즐겨 본다.
어떤 사람과의 아침 식사가 백억이나 할 만큼 가치 있을까 궁금해서다. 세상에 부를 쌓은 사람은 많지만 굳이 워런 버핏과 식사를 하는데 200억을 들이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니. 얼핏 보면 그들이 경영하는 회사의 연 매출, 웅장한 집, 슈퍼카와 명품들에 눈이 돌아간다.
“아, 대표님들은 왜 다 이래.”
진행자인 이이경은 하나같이 새벽 5시에 울리는 알람 화면을 보며 말한다.
기업의 대표라면 예상 가능한 그림인데도 나는 새벽 5시면 벌떡 일어나서 신문을 읽고 운동하는 그들의 모습이 욕실에 있던 에르메스 가글통보다 좋았다. 그들의 일상에서 일관성 있는 루틴이 돋보였다.
나는 부를 이룬 이들이 어디에 돈을 쓰고, 어디에 돈을 아끼는지 궁금해 주의 깊게 들여다 보았다. 루이비통 아령을 쓰지만 TV는 무료 프로그램만 시청하는 것, 직원들의 점심 식사 비용은 아끼지 않지만 무료 세차권을 이용하는 것. 코로나로 매출이 바닥에 떨어져도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는 것, 대저택에 살면서도 공사장에 못을 주워 오는 것, 돈만큼이나 시간을 쓰는데 꼼꼼함을 발휘하는 것.
위기를 예상하고 대응하는 방식, 사업을 운영하고 돈을 대하는 방식들이 저마다 달랐지만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자신만의 ‘기준’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돈이라는 존재에 대해 기준을 세운 적이 있던가.
백화점에 가서 그날따라 마음에 드는 옷을 만나면 어김 없이 신용카드를 꺼냈고, 여행을 가면 집에 오면 결국 버릴 기념품들을 사다 날랐다. 해가 갈수록 아이들의 사교육비에 쓰는 돈은 늘어갔고, 냉장고엔 안 먹고 버리는 야채와 반찬들이 가득했다.
그러니 카드값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었다. 신용카드는 소비에 대한 기준을 쌓는데 방해하는 제일 좋은 발명품이니. 포인트를 쌓으면 1년에 두 번 호텔숙박권이 나온다는 말에 고정지출에만 쓰려 했던 카드값은 역시나 늘어났다. 나의 비자금 통장에 든 금액이 그동안 나의 경제관념 실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 한들 하루라도 돈을 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어디에 돈을 소비하고 어디에 아낄지 기준이 없다는 것은 돈을 둘러싼 자신만의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무조건 아낀다고 소비를 제한하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랜 벗이 내가 사는 곳에 놀러오면 점심 한 끼와 커피 한 잔을 사야 마음이 쪼잔해지지 않았다. 헤어샵에 염색하러 가는 날이 잦아졌고, 아이들의 바짓단은 금방 짧아졌다. 축의금과 조의금 봉투를 쓸 일은 갈수록 많아졌다. 사람 노릇을 하고 산다는 건 돈을 쓰는 일과 무관할 수 없었다.
아이와 함께 블록을 쌓던 날이었다.
“엄마, 기둥을 튼튼하게 세워야 안 무너지지.”
바닥은 부실 공사를 해 놓고, 높게만 쌓으려는 나를 보며 아이가 말했다. 지금껏 내가 받은 월급들도 그렇게 흩어졌다. 돈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나만의 토대를 쌓은 적이 없으니 기둥을 쌓다가도 금새 무너졌다. 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자꾸 큰 그림을 그려보지 않으면 발을 디딘 땅은 울퉁불퉁하고 기둥은 세우기 어려웠다.
누군가는 꽃을 사는 일이 낭비라고 여길 수 있지만 생화의 향기와 기운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만 원의 행복일 수 있다. 누군가는 여행 가는 일에 기꺼이 돈을 쓰고, 평소에 커피값은 아낄 지도 모른다. 엄마는 아파서 병원비에 쓰느니 그 돈으로 좋은 식재료를 사다 먹겠다고 한다.
어떻게 벌고 쓸 것인가. 어디에 쓰고 어디에 아낄 것인가.
어린 시절엔 선생님이 ‘기준’을 외치고 한 친구를 호명하면 그 뒤로 줄을 서면 됐다.
이제는 그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