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자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독립성을 갖고 싶었다.
찰리 멍거
“캐릭터는 재벌인데 저는 그 당시에 형편이 제일 어려웠던 시기였어요.”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배우 이민호는 재벌 2세 역할을 맡았다.
그는 연기하는 동안 자신이 재벌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300대 1의 경쟁을 뚫고 주인공이 된 그의 현실은 정반대로 절박했으니까. 어떤 표정과 눈빛으로 표현해야 다 가진 사람처럼 보일 수 있을지 그는 거울을 보며 한참 고민하지 않았을까.
어느 날, 유튜브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제목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 가진 것처럼 살아라.’
제목에 속은 적이 많아서 클릭해 보진 않았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면 누군가 준 답을 듣고 뻔한 자기 계발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신 상상해 봤다. 다 가진다는 말이 부에 해당하는 경우라면 얼마큼의 돈이 있어야 다 가진 느낌일까. 그 느낌을 실현해 낸다면 내가 사는 모습은 어떻게 달라질까.
사실 나의 상상력도 잘 작동되지 않았다.
내 주위에 드라마 속 재벌 같은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였을까. 어린 시절, 내가 사는 동네는 특별히 비싼 아파트가 없었던 듯하다. 친구들의 환경도 비슷했다. 학교에 만 원짜리를 가져와 맛있는 걸 사준다고 생색내는 친구는 있었지만 나도 학교 앞 문구점에서 백 원짜리 종이 뽑기를 하고, 오백 원짜리 불량식품을 사 먹을 수는 있었다. 나의 부모님이 엄청난 부를 쌓은 적도 없었지만 지독히 가난해 본 적도 없었다.
얼마큼의 돈이 있으면 다 가졌다고 생각하게 될까.
올해 한국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이 생각하는 부자의 재산 규모는 평균 33억 원이라고 한다. 서울 집값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나는 소박하게 나만의 기준을 세우는 게 낫겠다. 내 비자금 계좌에 든 백만 원이 10배, 아니 100배쯤 늘어나면 만족스러울까. 천만 원이 되면 또 이 돈을 불리고 싶을 것이다. 1억이 되면 10억을 가지고 싶어질 게 뻔하다.
얼마를 모으고 싶다는 생각에 앞서 어디에 쓰고 싶은지부터 신나게 떠오른다.
비싼 프라이팬을 사고 싶다.
보여주기 위한 물건이 아닌 일상에서 매일 쓰는 좋은 물건들. 언젠가 엄마가 나에게 핀잔을 준 적이 있다. 100만 원짜리 옷은 사면서 하루에 삼 분의 일의 시간을 함께 하는 이불은 10만 원짜리를 고르면서도 벌벌 떤다면서. 순간 나는 정곡을 찔려 나의 소비 관념을 돌아보게 됐다.
우리 집에 정리전문가도 부르고 싶다. 깔끔할 뿐 아니라 체계적인 정리시스템을 배우고 싶다. 바구니에 집어넣어놓고 물건 찾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고,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을 소중하게 진열해서 소비를 줄이도록.
일주일에 3번 운동 트레이너와 약속을 잡고 싶다.
나의 뼈와 근육 구석구석을 움직여 노화를 늦추고 싶다. 무릎 아프다고 하지 말고, 더 오래 좋아하는 사람들과 산길을 오르고 내릴 수 있으면 좋겠다.
연매출 몇 억을 꿈꾸는 사업가도 아닌, 연차가 쌓일수록 월급이 올라가는 직장인도 아닌 내가 무슨 수로 다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상상하는 건 은밀하고 즐거운 작업이었다.
내 비자금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경제서만 모아 놓은 책장 한 칸에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부’는 숨어 있다. 부는 쓰지 않은 소득이다. 부는 나중에 무언가를 사기 위해 아직 사용하지 않은 선택권이다. 부의 진정한 가치는 더 큰 부가 되어 지금보다 더 많은 것들을 살 수 있는 선택권과 유연성을 제공하는 데 있다.
- 『돈의 심리학』 중 P. 165
『돈의 심리학』 의 저자 모건 하우절은 ‘소비 부자’와 ‘자산 부자’를 구분했다. 현재의 소득으로 큰 집과 차를 소유한 부자는 소비 부자다. 차지 않은 시계, 포기한 옷 때문에 롤모델을 찾기 쉽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물건으로 바꾸지 않은 금전적 자산을 갖춘 자는 자산 부자다. 자산 부자가 되는데 필요한 제약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니 일반 사람들이 그 길을 배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보지 못하니 상상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일. SF영화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부를 이루는 데도 보이지 않는 길을 상상하고 묻고, 찾는 것.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내 상상의 시작은 소비의 풍요 속에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절제라는 생각부터 뻗어 나갔다.
Chat GPT가 답해줄 수 있는 절약과 저축, 소득 증대와 같은 답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단지 많은 이들은 진짜 누군가가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 위해 꽃길 뒤에서 겪은 야생의 삶을 유심히 살피지 못한다.
내 비자금 통장에 눈에 보이지 않는 부를 쌓고 싶은 야망이 스멀스멀 생겼다. 포르셰가 아닌 포르셰를 살 수 있는 자산을 마련해 놓은 곳간. 가치 있는 곳이라면 기꺼이 꺼내 쓸 수 있는 작은 곳간을 만들고 싶어졌다. 찰리 멍거 같은 부자 현인들의 기운을 받은 느낌이랄까. 내 마음속 깊이 독립성을 장착할 수 있다면 수영장 딸린 집에 살지 않아도 넉넉한 마음이겠다는 가상현실을 그려 보았다.
나의 상상이 더 신나고 대담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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