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이었던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서로를 위한 기념일 선물을 준비하곤 했다. 이제 결혼 10년 차가 된 우리는 아이들 생일에 치여 결혼기념일도 까맣게 잊고 지나친다. 우리는 서로의 생일이 가까워지면 대놓고 묻는다.
“자기, 뭐 필요한 거 있어?”
필요한 거야 항상 많다.
옷장에 가득한 옷들은 유행이 지났고, 신발장에 자리 싸움을 하고 있는 신발들은 내 눈에 뒷굽이 닳아진 듯 보인다. 화장을 안 하는 날은 없으니 갖가지 화장품은 많을수록 좋다. 립스틱부터 선크림, 파운데이션, 아이크림, 비타민 앰플, 속눈썹 영양제....
‘화장품으로는 좀 약한데. 내 생일이 겨울이었어야 코트 한 벌 사 달라고 할텐데.’
한여름에 나를 낳았을 엄마의 고생은 뒤로 하고 괜한 생일을 탓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기저귀를 차고, 한밤 중에 깨어나 울 때는 조금이라도 나를 덜 초라하게 해줄 물건을 찾았다. 점퍼 주머니 속엔 항상 가제 수건이 있었고, 백팩에는 물티슈와 아이들의 여벌 옷들이 들어 있었다. 남편은 화장기 없이 트레이닝복을 주로 입는 나에게 쉽게 걸칠 아우터를 선물로 사주곤 했다. 나는 최대한 아이들이 무엇이든 묻혀도 괜찮을 어두운 색 옷을 택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닐 때쯤 되자 백팩이 아닌 핸드백에 눈이 갔다.
내가 기저귀를 담을 백팩을 사는 동안 명품샵은 번호표를 뽑고 대기를 해야 하는 곳으로 바뀌었고, 명품백 가격은 내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기준을 훨씬 넘어섰다. 명품백은 원래 합리적인 구매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이제 귀걸이도 해볼 여유가 생긴 것 같아 쥬얼리샵도 기웃거렸다.
몇 년전만 해도 남편이 가끔 갖고 싶은 게 없냐고 물으면 온갖 물건들을 떠올렸다.
어차피 한통속에서 나오는 돈인데도 최대한 비싼 물건이 없나 잔머리를 굴렸다. 아이들이 제 발로 걸어 다니고, 혼자 외출할 정도가 된 지금 나는 물티슈뿐 아니라 품위 유지를 위한 물품들이 추가로 필요했다.
남편이 살짝 취기가 올라온 날을 골라 10년 동안 못 받은 결혼기념일 선물까지 합쳐 에르메스 가방을 사달라고 해볼까. 그는 에르메스 가방이 얼마인 줄 모르고 까짓거 사준다고 할지도 모른다. 돈이 있어도 매장 이용 실적과 직원과의 인맥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가방이라는 사실을 모를 테다. 신상백에 관심이 크지 않은 나도 사실 누군가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지나간들 알아보지 못할 확률이 크다.
그러고 보니 사실 나도 남편에게 결혼기념일 선물을 제대로 사준 적이 없다. 선물은 받기만 하고 속옷이나 양말을 사주며 생색낸 게 얼마 안 된 일이다. 나한테도 그동안 못 받은 선물을 내놓으라고 하면 낭패다. 그래도 에르메스 가방 정도 가격이라면 나에게 남는 게 있을 테다.
작년에도 남편이 물었다.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게 있는지.
웬일인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이 많이 커버려서일까. 경력이 단절되고 아이들을 키우며 보낸 10년의 세월이 아무리 비싸다 한들 가방 하나로 바꿀 수가 없어서였을까. 문득 내가 정말 갖고 싶은 건 뭔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비자금 계좌에 대한 고민은. 지금껏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모아야 할지 몰라 나를 꾸밀 적당한 사치품으로 대체되었던 무엇을 찾아가야 했다. 일단 금덩어리를 받아놓고 나중에 필요한 곳에 쓰고 싶어졌다.
내 입에선 이제 다른 대답이 나왔다. 나는 살짝 윙크를 하며 남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알잖아. 여보. 후훗.”
애교라고는 일도 찾아볼 수 없던 아내에게서 나오는 저 눈웃음은 무슨 꿍꿍이인가 하는 표정. 흰 봉투나 계좌에 찍히는 숫자로 당신의 성의와 사랑을 확인하겠다는 여우 꼬리 같은 기운이 낯선 느낌. 쥐꼬리만큼 조금씩 모아 놓은 자신의 비자금 통장에서 얼마를 빼야 할지 고민하는 눈빛. 그 남자는 꽤 당황한 듯 보였다.
다음 날 나는 카톡을 보냈다. 이모티콘과 함께 새로운 계좌번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