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인 Oct 09. 2024

그때 나가볼 걸 그랬어

약간의 웨이브가 있는 짧은 머리,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그리고 운동화 차림. 늘 그렇듯 친구는 핸드백 하나 없이 차 키와 지갑만 들고 나타났다. 어떤 가방을 멜까 고민하던 내가 무색하게.


미국에 사는 그녀가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

다섯 명의 친구들이 커피숍에 모였다. 얼마만일까. 미국에 사는 것도 아닌데 남은 우리들도 갈수록 얼굴 보기가 힘들다. 중학생이었던 친구들이 이제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고, 이직을 고민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친구의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어? 호카 운동화네. 나 이거 사고 싶었는데.”

“그거 러닝화 아니야? 요즘 나이키 말고 이 신발 많이 신더라.”


친구들의 시선이 운동화로 향했다. 친구는 발이 편해서 호카 러닝화를 신게 된다고 했다. 탱크톱과 짧은 바지를 입고 거리를 뛰는 많은 미국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친구가 미국에 가서 산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삼 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나는 친구의 몸을 보며 놀라곤 했다. 원래 우리 중에 제일 통통했던 친구였다. 그런 그녀가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 음식 때문에 더 살이 찌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나는 친구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필요 없는 지방들을 태워 근육으로 승화시킨 그녀의 몸은 그야말로 잘생긴 말 같았다.


남편 말고는 어울리는 사람도 없이 직장생활만 하는 친구는 점심시간에 건너편에 있는 크로스핏 짐에 간다고 했다. 턱걸이를 하고, 바벨을 들면서 미적분 같은 프로젝트를 매일 해결해 나갔을 것이다. 인도 동료의 영어가 오후엔 평소보다 더 알아듣기 나았을지 모른다. 할 일이 없어 가는 거라고 말하지만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이기며 자신을 지키는 방편이었을 테다. 그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경외의 눈으로 그녀의 팔뚝과 복근을 만져보느라 바빴다.




러닝화를 보니 생각난다며 두 살, 세 살인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 친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저번에 아이 데리고 소아과에 갔다가 약국에 내려갔거든. 근데 약국에 마라톤 메달이 많이 있는 거야. 약사님한테 러닝 하시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이따 오후 6시에 사람들이 모여서 러닝 하니까 나오라는 거야.”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모여서 들 러닝을 하더라.”

미국 친구는 신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쪽에 종이 있으니까 연락처 쓰고 가라는데 무서워서 얼른 나왔어. 전화번호 쓰면 진짜 나가야 할 거 같아서.”


우리는 다들 웃었다.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에 갔다가 받은 제의가 웃겨서 말이다. 두 살배기 엄마는 아기띠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잠잘 시간도 부족한 아기 엄마가 러닝을 한다는 게 상상이나 가는 일인가. 초등학생을 둔 나도 그리 자유롭지는 않은데 말이다. 물론 내 경우엔 살짝 핑계를 더해서다.


“그런데 말이지. 지금 생각해 보니까 못 갈 것도 아니었던 거 같아. 내가 나가면 남편 혼자 애 둘을 어떻게 먹이고 재우고 할까 하는 걱정에 꿈도 안 꿨지.”


아이가 없는 친구들은 동정의 눈빛으로, 아이가 있는 친구들은 격한 공감의 눈빛을 보냈다.


“그때 내가 나갔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거든.”


우리도 각자 상상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아기띠를 벗고, 분유를 챙겨놓고 한강변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숨이 차 얼마 못 뛰더라도, 탱크톱과 숏츠는 못 입더라도, 남편 혼자 한두 시간 고군분투하더라도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운동화를 신고, 머리를 묶고 바람을 맞으며 뛰어보고 돌아왔더라면 말이다.


다른 종류의 피로가 느껴졌을 테지만 그날밤 아이의 울음소리가 좀 더 평온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숨소리에 집중한 한 시간이 자신의 일부를 비춰주는 작은 불빛이 되어준 건 아닐까.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많이 아팠다. 병원에서 검사하면 특별한 원인이 나오지 않는 열병과 몸살을 겪었다고 했다. 이모가 와서 엄마에게 수액을 놔주던 모습이 내 기억에도 남아 있다. 그때는 엄마가 왜 아픈 줄 몰랐다. 일찍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아 키우고, 매일 밥 하는 일상을 반복했을 엄마의 20대 세월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엄마도 그때 뛰지 못했으리라.


늦게나마 엄마는 뛰었다.

그래서 치유될 수 있었고, 자신을 돌볼 수 있었다.


숨이 차도록 움직여 내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대퇴근과 삼두의 긴장을 느끼는 일이 ‘나를 우선에 두는 일’이라는 생각이 다가왔다. 내 몸은 연예인들의 인스타그램 속 사진처럼 날씬하지도 않으며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는 일보다 시간도 더디게 가고, 캠핑처럼 먹는 낙도 없는 그 일이 결국 내 안으로 향하는 지름길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


뭐가 그리 바쁜지 서로 전화는커녕 카톡 답장할 시간도 넉넉하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바빴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친구도, 아직 분유 가방이 무거운 친구도, 학군지 이사를 고민하는 학부모 친구도 러닝화를 잊고 살았다.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만성피로를 느끼는 오후, 다들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하자는 눈빛을 교환했다.

의 시선은 다시 호카 운동화로 향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