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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Oct 27. 2024

생의 한낮

“여러분이라면 이 그림을 집에 걸고 싶으세요?”     


도슨트가 물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림 속 나무도, 하늘도 칠흑처럼 어두웠다. 


깜깜한 배경에 마치 조명이 비치듯 돋보이는 대상이 보였다.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배를 타고 섬을 향하고 있었다. 여인의 앞에 놓인 흰색 물체는 남편의 관이다. 내 앞에 걸린 작품은 스위스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이었다. 올여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둘러봤다. 다 둘러보기도 힘든 많은 작품 중에 유독 이 작품이 나의 뇌리에 남았다.  


우리 집 거실에 해바라기가 아닌 이 그림을 걸어둔다면. 

약간의 거부감이 밀려온다. 풍수지리상 어두운 수맥이 흐를 것만 같다. 거실에는 자고로 돈이 들어오는 그림을 걸어야 하는 게 아닌가. 


‘침실에 거는 게 좋을까?’ 그런데도 자꾸만 이 그림을 걸어둘 장소를 혼자 상상하게 된다. 왜일까. 평화로운 모네의 정원 그림도 아니요, 난해하지만 세련되기도 한 추상화도 아니며 우아한 발레리나의 모습이 담긴 드가 작품도 아닌데 말이다. 




끈질기게 물었더니 내 안의 도슨트가 말했다. 

그림을 볼 때마다 죽음을 떠올리며 정신이 바짝 차려질 거 같아서라고.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결론만 내리지 말고. 책장에 꽂힌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을 꺼내 보라고. 제목이 무섭긴 하지만, 아침마다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한 번은 생각해 보라고. 


보편적인 죽음이 개별적으로 다가올 때 잠시나마 유튜브를 끄고 분류 작업을 하게 될 테니까.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과 던져도 될 것들이 무엇인지. 열심히 살 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군가는 더 예쁘게 꾸미고 놀아야겠다고 한다. 맞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잘 놀아봐야 나이 들어 방탕하지 않을 테다. 주름이 더 지기 전에 꾸며 봐야 자연스럽게 꾸미는 법도 터득할 테다. 그런데 놀면서도 죽음을 자주 떠올리면 좋겠다. 며칠 연습해 봤더니 조금씩 머릿속에서 선명해지는 게 있다. 며칠 지나면 또 잊어버릴 테니 나는 뵈클린의 그림을 걸고 싶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생이 이토록 빨리 지나가다니.
이럴 때 두려운 것은, 화산의 폭발이나 혜성의 충돌이나 뇌우의 기습이나 돌연한 정전이 아니다. 실로 두려운 것은, 그냥 하루가 가는 것이다. 
-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중 p. 19    

  

엄마는 마치 뵈클린의 그림을 집에 걸고 사는 사람 같다.

한시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 생각하고, 움직이고, 행한다. 실로 그냥 하루가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내년 생일이 100세인 것처럼. 104세인 김형석 교수도 늘 읽고, 쓰기에 무기력한 노인이 되지 않는 거라며.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어떻게 늙어가야 할지 천천히 생각한다. 노년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준비하는 노년은 조금 더 견딜만 할 것이다. 무기력하지 않게 움직일 수 있는 몸을 훈련시켜 두고, 몸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도 팽팽해진다면. 


키케로는 기억력을 훈련시키기 위해 낮에 말하고 듣고 행한 것을 저녁에 마음속에 떠올려본다고 했다. 그러다 보면 갑자기가 아니라 언제 슬그머니 노년이 다가오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는 노년에 관해 최선의 무기는 학문을 닦고 미덕을 실천하는 것이라 말한다. 숏츠를 보다 갑자기 학문을 닦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미덕이 더 문제다. 노년이 되어 갑자기 내 안에 없는 미덕이 튀어나오기는 어려워 보이니 말이다.




키케로가 노년을 위해 갈고닦아야 한다고 한 무기는 학문과 미덕이었다.  

엄마가 생각하는 무기는 운동으로 갈고닦은 몸이다. 바디 프로필을 찍기 위한 몸이 아니라 평소에 구석구석 써서 녹슬기를 늦추는 몸이다. 내 몸이 녹슬면 지혜도, 학문도, 미덕도 닦을 힘이 부족할 테니 말이다. 맑은 영혼을 위해 내 몸을 먼저 괜찮은 상태로 만들어 놓는 일이다. 


삶을 이겨낼 무기 촉을 날카롭게 다듬는 일이다. 언제나 엄마는 운동으로 삶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뒤돌아보니 이제야 엄마 말이 조금씩 나에게 스며든다.      


도슨트분이 헤어지며 말했다. 

유명한 작품을 찾아다니기보다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나만의 그림을 찾고 가시면 좋겠다고. 배고프고 다리 아프다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미술관을 나왔다. 입장료가 아까웠지만 나는 물음표를 하나 건져왔다. 


지금이 생의 한낮이라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라도 출세나 업적을 쌓는 일을 찾아볼 수는 있겠으나 죽음을 상상하며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분명 있을 텐데. 한 가지 확실해진 건 있다. 


일단 나가서 걸어보는 거다. 걷다가 부족하면 뛰어보는 거다. 그러다 보면 정신이 맑아질 것이다. 운동기구의 무거운 추를 당기며 팔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오면 뭔가 해볼 자신이 생길 것이다. 삶에 지지 않고, 이겨볼 힘이 날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이번 생에 바디 프로필을 찍기는 틀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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