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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텅 빈 방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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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은 Jun 26. 2022

일상으로 파고든 기억

- 베를린, 폴란드 일기 4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이론가·혁명가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도왔으며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데 대중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혁명을 통하여 전쟁 종식과 프롤레타리아 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했고 1918년 독일 공산당을 창설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태어날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령이었다. 만약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사회주의가 힘을 받았더라면 나치가 부흥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내뱉는 이들도 있었다. 로자는 여성이었고, 한겨울에 살해당했으며, 슈프레 강에 던져졌다. 시신은 숨진 지 90년 만에 베를린 자선병원 의학사박물관 지하창고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그 자리에 기념물이 세워졌다. ‘Rosa Luxemburg Denkmal & Steg’가 독일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베를린 초 역에서 내려서 동물원 쪽으로 걸어간다. 동물원 정문은 마치 중국에서 세운 것 같은 붉은 기둥과 지붕이 서 있다. 구글 지도에서는 이곳을 통과하라고 했지만, 동물원 직원은 표를 사야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근처를 헤매다가 다시 지도를 보여주면서 이곳을 가고 싶다고 했더니 건물을 빙 둘러가라고 했다.

여행 내내 구글 지도는 우리를 편하게 이끌기도 했지만, 가끔 이렇게 엉뚱한 길을 안내했다. 가로지를 수 있는 길을 빙 둘러가게 한다거나 입장료를 내야 하는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어쨌든 동물원을 크게 빙 둘러서 걷는데 그 안에 있는 동물들은 보지 못했으나 동물 냄새는 진하게 맡았다. 


    

드디어 강에 도착했다.

산책하는 시민들을 따라 걸어서 드디어 바라던 곳에 도착했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근처에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글자가 기념물로 우리를 맞았다. 

한 사람이 목숨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세상은 오지 않았고, 더 나쁜 세상이 군홧발 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그리고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이 다리 근처에서 나는 시의 한 부분을 읽었다.

그곳까지 들고 간, 송경동 시인이 쓴 ‘새로운 인류애로 다시 서로를 무장하라-제9회 맑스코뮤날레에 함께하며’라는 시 앞부분이었다. 


‘현실 사회주의는 대부분 깃발을 내리고

자본주이만 만국으로 단결하며

돈과 상품과 무한 경쟁의 유령만이

모든 세계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새로운 제국의 시대에

맑스와 엥겔스를 레닌과 로자를

기억한다는 건 외로운 일이지’

 

이 시를 읽는 나를 반려가 동영상으로 찍었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췄다. 원래는 시 전문을 다 읽을 생각이었으나 산책로가 좁아서 다른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할 수 없어서 여기까지만 읽었다.

이 시는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라는 시집에 실렸다.

    

히틀러는 순혈주의를 내세웠다. 아리안족이 완벽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특히 유대인들을 사회에서 몰아내고자 했다. 처음에는 게토에 가두었다가, 가슴에 별을 붙였다가, 수용소로 보냈다가, 독가스로 죽이고 불태워서 밭에 뿌렸다. 

이 과정을 담당했던 부서가 있다. 바로 유대인 강제 이송을 담당했던 ‘제국보안본부’다. 제국보안본부의 제 4부는 게슈타포라 불리는 비밀 국가경찰이 활동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지금 건물이 남아 있지 않고, 그 자리에 버스 정류장이 들어서 있다. 

   

100번 버스와 M29 버스를 타고 ‘쥘터 호텔(Sylter Hotel)’ 역에 내리면 제국보안본부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다. 버스를 타고 내리는 순간, 이곳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기념물을 만난다.


이른바 ‘Mahnort’ 정류장이다. ‘Mahnort’는 부정적인 의미로 꼭 기억하자는 뜻이다. 정류장 앞부분에는 독일어로, 뒷부분에는 영어로 이곳에 대한 설명이 있다. 당시 건물들과 이를 담당했던 공무원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진도 있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 정책 가담자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군에 붙잡혔다가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그러다 이스라엘 비밀 경찰에 정체가 발각되어 체포된 뒤 이스라엘로 이송되었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을 받았다. 이를 지켜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45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내 죽음으로 내몬 사람이라고 보기엔 아이히만이 정말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평범한 곳과 평범한 사람들도 악을 저지를 수 있다.

‘꼭 기억해야 한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래야 악이 벌어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독일 저항 추모관(Gedenkstätte Deutsher Widerstand)’은 정문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숙연해진다. 나체로 서 있는 남자와 그 앞에 있는 길고 좁은 청동 단상, 넓은 광장이 보인다. 

청동상 앞에는 작은 명패가 바닥에 붙어 있다.


 두 손은 앞으로 묶였지만 굽히지 않는 태도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이 청동상이 보인다. 이 청동상은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들을 의미한다.

‘그대들은 불명예를 참지 않았습니다. 그대들은 저항했습니다. 자유와 정의와 명예를 위해 뜨거운 생명을 바쳐 그대들은 위대하게 영원히 깨어있는 회개의 표시를 했습니다.’

   

 이 박물관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전시물은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 다루었던 ‘폰 슈파우펜베르크 대령’에 관한 것이다. 그는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암살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폭탄이 들어 있던 가방을 그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이 약간 이동시키는 바람에 작전이 실패했고, 슈파우펜베르크 대령과 그 동조자들은 총살당했다. 그들이 총살당한 ‘벤들러 블록’도 이곳에 있다. 메르켈 총리가 벤들러 블록에 헌화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다른 화환이 걸려 있다.

‘1944년 7월 20일 독일을 위해 이곳에서 사망’이라는 문구 아래, 총살당한 사람들 이름이 씌어 있다. 박물관 안에는 이곳에서 누가 몇 시에 처형당했는지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독일 저항 추모관’은 슈파우펜베르크 대령뿐만 아니라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들을 알리는 곳이다. 우리가 이름을 아는 이들도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한스 솔과 소피 솔 등 나치에 저항한 사람들도 그곳에 있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자신이 한 행동이 발각되거나 수포로 돌아간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동료들까지 다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과연 나라면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다 던지고 악과 맞설 수 있을까. 나는 수없이 주저하고 망설인다. 중요한 결정을 하나 내리는데 망설이는 순간이 여러 번이다. 그러다 선택하는 길은 대부분 처음에 마음이 갔지만 어렵고 힘든 곳이다.

“할까 말까 망설일 때,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

망설일 때마다 반려가 했던 충고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부터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움직였고, 기억의 벽을 함께 만들었고, 팽목바람길을 걸었다. 매 순간 망설이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리고, 다른 일이 생기면 미루기도 했지만 늘 내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한다. 망설이면서도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악에 저항하는 내 소심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소심한 사람이 벌이는 작은 행동들도 모이고 또 모인다면, 그리고 기억한다면 악이 우리 사회에 저지른 폐해들도 돌아보는 사람들이 생기겠지. 이런 작은 바람 때문이다.


고된 하루 일과가 끝났다.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호텔 근처 지하철 역에서 내려 역 출구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미지근한 맥주 한 병을 샀고, 병따개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따 달라고 한 다음 마개를 다시 막았다. 주인이 좋아한다는 하리보를 샀고, 스낵 한 봉지도 구입했다.

“어디에서 왔어요?”

“한국이오.”

“오! 난 한국 음식을 사랑해요.”

와우, 지친 하루를 달래는 꿀맛 같은 소리였다.

“어떤 음식을 좋아해요?”

반려가 물었다.

“Everything!”

우리는 웃으며 가게를 나왔다. 처음 유럽 여행을 할 때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북쪽인지 남쪽인지 묻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먼저 중국, 일본을 언급한 다음 우리가 아니라고 하면 그 다음 질문은 그럼 도대체 어느 나라냐고 되묻곤 했다. 그런데 이젠 우리 나라를 안다. 여행자인 내게 뿌듯함을 주었듯이 유학생이나 이민자들은 더할 것이다. 

    

숙소 앞 벤치에서 맥주를 마셨다. 슈프레 강을 보면서 병째 마셨다. 내가 앉은 의자 뒤로 케테 콜비츠 흉상이 보였다. 전쟁에 저항한 예술가이자 어머니 케테 콜비츠.

베를린에 남은 기념물 가운데 우리가 놓치는 곳들도 있겠지. 모든 곳을 다 돌아볼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곳을 다녀간 다음과 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분명히 다를 거야.

   

슈프레 강 위로 유람선이 흘러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니 후회없이 살아보라고 나를 응원한다. 미지근한 맥주가 한 모금씩 목으로 넘어가면서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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