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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텅 빈 방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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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은 Jul 04. 2022

베를린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말아요.

- 베를린, 폴란드 일기 6

히틀러는 독일을 장악하고 이후에 눈엣가시 같았던 유대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유대인들을 유배 보내려 했는데,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영국령을 통과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유대인들을 게토로 가둔 다음 질병과 굶주림에 고통 받게 했다가, 수용소로 이동시켰다.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비단 유대인뿐만 아니라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정적들, 동성애자, 장애인 등이었다. 물론 유대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후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는 확대되는 전선을 따라 점령한 지역의 유대인들과 정적들을 수용소로 몰았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Jüdisches Museum Berlin)은 동선이 급격하게 꺾인다. 이 건물을 하늘에서 보면, 지그재그로 꺾인 형태라고 한다.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을 변형한 형태다. 유대인들이 어떤 오해를 받았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지상층 전시물들은 대부분 유대인을 설명하고 그들의 역사를 알리는 곳이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로 ‘memory void’에 놓인 철판이다. 1만 여개 철판으로 만든 얼굴들이 낙엽처럼 바닥에 깔려 있다. 이곳을 밟고 지나가면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유대인들이 지르는 비명처럼 들린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르는 비명을 내 몸으로 재연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비를 살포시 그 앞에 두었다. 


   

‘나비’ 인형은 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종군위안부를 겪은 피해자들을 상징한다. 동시에 그 끔찍한 일들을 스스로 말하고, 싸우면서 바꾸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누군가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어거지를 피우고, 자발적으로 따라간 사람들이라고 명예를 훼손한다. 그러나 진실은 이런 억지에 부딪히는 사람들을 통해 드러난다.

독일군은 수용소에서 일어난 끔찍한 학살을 부정하고 덮어버리기 위해, 모든 기록을 없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이 전부였는데,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증명하는 사진 몇 장이 나타났다. 

역사는 이런 것이다.

나는 역사가 지닌 힘을 믿는다. 그래서 의자에 앉은 소녀상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피해자가 들르지 못한 곳에서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믿는다. 


지하에서 전시물을 둘러보다가 막다른 곳에 있는 커다란 철문을 만났다. 철문을 열고 나오는 관람객들을 보고 그곳으로 들어간다. 층고가 높고, 대각선으로 꺾인 불안한 구조물이 나타난다. 철문이 닫히면 어둡고 불안하며 출구가 없는 느낌을 받는다. 밤낮이나 시간, 공간을 가늠할 수 없이 폐쇄된 공간에서 높은 천장 구석으로 새어들어오는 불빛만 보인다. 사방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힘들었던 때에 어딘가 탈출구가 있을 것 같은 가느다란 희망. 그 희망을 붙들고 살았던 사람들을 돌이켜본다.     

무거운 마음으로 나오면, 정원으로 나가 잠깐 쉴 수 있다. 카페에서 음료수와 간식을 사서 먹는 사람들도 있고, 어두운 마음을 정화하는 녹색 정원을 산책하는 이들도 있다.     


테러의 토포그래피 박물관(Topographie des Terrors)는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본부가 있던 자리였고, 그 이전에는 공예 학교가 있던 곳이다. 현재는 베를린 장벽을 그대로 이용해 담처럼 삭막하게 두었고, 참사를 추모하는 역사 박물관을 세웠다. 12년간 정권을 잡은 나치가 인류사를 뒤흔든 사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박물관 실내 전시에는 나치 시대에 이루어진 갖가지 만행들과 부끄러운 역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영화와 문학으로 재연했던, 거리에서 이루어진 집단 처형과 이후 매단 채 방치한 시신들, 그리고 그 시기 집단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벌였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어 히틀러를 경배하는 인사를 할 때 팔짱을 끼고 저항하던 사람까지 풍부한 자료들과 만날 수 있다.

야외 전시는 베를린 장벽을 뒤로 하고 그 앞으로 전시물을 배치했는데, 독일 역사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과거를 남김없이 드러낸다. 많은 관람객들이 사진과 글을 보면서 비극으로 한 발짝 다가간다.      


6월, 베를린은 해가 길다. 섬머타임을 적용해서 오후 9시가 넘어야 해가 진다. 오전 4시가 조금 넘으면 해가 뜨기 때문에 하루가 무척 길다. 그 긴 하루 가운데 오후 5시에서 6시가 가장 햇살이 뜨겁다. 유럽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려면 스타벅스 매장을 찾아야 하지만, 번화가에만 있으므로 대신 아이스크림을 샀다. 레몬 샤벳 아이스크림은 눈을 찡긋할 정도로 새콤하고, 요거트 아이스크림은 가슴을 쩡 울릴 정도로 차갑다.


이번 여행에서는 아이스크림은 몇 번 사 먹었다. 유럽에 아이스크림이 맛있기로 소문난 도시들이 몇 있다. 베를린 아이스크림도 맛이 괜찮았다.  

   

카데베 백화점에 들러, 자주 불면증에 시달리는 반려와 가끔 잠을 못 드는 나를 위해 잠 잘 오는 차를 샀다. 그리고 첫째가 원하는 오일파스텔과 펜 몇 개를 샀다.

그리고 커리 부어스트를 사 먹었다. 구운 소시지와 튀긴 감자를 소스에 찍어먹는데, 그 소스가 케첩 위에 카레 가루를 뿌린 것이다. 베를린에는 커리 부어스트 가게가 곳곳에 있다. 그리고 슈퍼마켓에는 커리 부어스트 소스만 따로 팔기도 한다. 솔직히 내 입에는 잘 안 맞았다. 짜고 느끼했다.      

무거운 전시를 본 뒤라 힘들었다. 사람이 어디까지 악할 수 있는지 돌아보면서, 내 주변에서 발견하고 느꼈던 악을 떠올렸다. 수십 일을 단식하면서 주장하는 소리를 외면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신경 쓰지 않고, 위계로 짓누르며 성폭력을 자행하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면서 벌어진 악을 나 몰라라 하는 일들은 일상에서 자주 마주친다.


그동안 내가 끌려다녔던 숱한 일들과 수동적으로 했던 일들이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하루종일 말을 아꼈다. 나는 아직 용서를 할 수 없구나, 그들이 저지른 일들을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구나.

숱한 정원을 가꾸고 사람들을 위로했던 사람들이 성폭력 사건을 일으키면서 역사를 수십 년 뒤로 후퇴시킨 일도 그렇다. 우리 사회는 아직 피해자들에게 너그럽지 않다. 사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가 하면, 가해자가 이룬 업적이 크기 때문에 충분히 덮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룬 업적이 수십 개의 정원을 만든 것이라면, 그들이 저지른 성폭력은 이 정원들을 한꺼번에 다 태울 정도로 강력했다. 이후 조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정한 사회를 바란다면, 실수를 스스로 인정해야 하고, 실수한 사람을 나무라고 꾸짖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이 공직자이든 아니든.   

  

베를린에서 마주친 역사는 강력하게 호소한다.

‘우리는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을 낱낱이 드러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

한국은 어떤 각오로 부끄러운 역사를 알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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